지난 4월 미국 여행을 갔다 온 문모(68·충북 청주시)씨는 쓰고 남은 달러를 원화로 환전하지 않고 그대로 갖고 있다. 기회가 되면 달러를 더 사둘 예정이다. 두어 달 사이 환율이 50원이나 오른 데다, 경기가 불안하다고 하니 앞으로도 달러를 적당히 갖고 있는 편이 안심될 것 같아서다. 문씨는 "나라 안팎으로 경제가 안 좋다고 하고, 국내에서도 투자할 데가 마땅치 않아서 달러나 금을 조금씩 사모으려고 한다"면서 "모임에 나가봐도 지인들이 어느 정도 달러를 갖고 있어야 안심된다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최근 두 달간 50원 넘게 오른 달러 대비 원화 환율이 쉽사리 내려갈 조짐을 보이지 않고 1180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국내 투자처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달러 가치가 치솟자 개인 투자자 사이에서는 ‘달러 사자’ 움직임이 불고 있다. 사진은 17일 서울 중구 KEB하나은행 딜링룸 전광판에 전날보다 1.2원 오른 1186.5원으로 끝난 환율 종가가 표시된 모습.

경기 침체 우려 속에 개인과 기업들이 지난달에만 수조원대 달러 예금을 사모은 것으로 집계됐다. 17일 한국은행은 5월 말 기준 '거주자 외화예금'이 총 656억1000만달러로 전달보다 24억1000만달러 늘었다고 밝혔다. 거주자는 내국인과 국내 기업, 국내에 6개월 이상 거주한 외국인, 국내에 진출해 있는 외국기업 등을 말한다. 이들이 판 외화예금보다 산 외화예금이 많아서 월말 잔액이 크게 늘어난 것이다. 증가분의 대부분인 21억9000만달러(2조6000억원)가 미 달러화 예금이었다. 우리나라 전체 달러 예금은 기업이 80%, 개인이 20%가량 갖고 있는데, 지난달 달러 예금 증가분의 3분의 1을 개인이 주도할 정도로 개인 투자자 사이에서 강한 '달러 사자' 움직임이 있었다.

◇개인 달러 예금 보유 비중 사상 최대

통상 환율이 급격히 오르면 달러 예금은 줄어드는 경향이 있다. 갖고 있던 달러를 팔아 차익 실현하려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4월까지만 해도 그랬다. 올 초 달러당 1120원대에 머물던 환율이 뛰기 시작한 건 4월부터. 미·중 무역 갈등 심화, 수출 부진, 1분기 마이너스 성장률 쇼크, 경상수지 7년 만에 적자 등 악재가 겹치면서 원화가치가 가파르게 떨어지기 시작하자, 사둔 달러를 팔아 차익을 실현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1월 말 기준 636억7000만달러였던 외화예금은 4월 말 534억6000만달러로 102억달러 넘게 빠졌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5월부터다. 환율이 1200원을 위협할 정도로 올랐는데도 오히려 '달러 사자' 행렬이 이어진 것이다. 한국은행 국제국 김자영 과장은 "통상 기업들은 수출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그달에 파는 경향이 있는데, 지난달엔 달러를 팔지 않고 계속 보유하는 곳이 많았다. 개인들도 전체 달러 예금 증가분의 34%를 사들일 정도로 강한 매수세를 보였다"면서 "기업과 개인 모두 환율이 더 오를 걸로 기대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개인들의 집중 매수 때문에 지난달 달러 예금 중 개인 비중은 21.6%로 한은이 월별 거주자 외화예금 잔액을 집계한 이래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환율 맞히기 무의미… "달러 자산에 적절한 분산을"

요즘 개인 투자자들은 환율 맞히기에 여념이 없다. 1200원을 뚫고 올라가느냐, 얼마까지 올라가느냐가 관심사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환율 맞히기는 주가지수 맞히기보다 더 어렵다. 전문가들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와 미국 중앙은행의 금리 인하 움직임, 미·중 무역 분쟁 진행 상황 등 수많은 국제경제 변수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기 때문에 단기간 내에 환율 등락을 예상하고 투자하는 건 무의미하다는 얘기다. 조성민 SC제일은행 압구정 PB센터 부장은 "달러 투자는 타이밍보다는 자산 분산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길게 보고 분할 매수를 통해 달러 자산 비중을 높여가는 게 좋다"고 조언했다.

시중은행들은 달러에 투자하려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특판 상품을 내놓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10월 말까지 수시입출금 달러 예금인 '수퍼플러스' 신규 가입자에게 하루만 맡겨도 연 1.8%의 금리를 준다. SC제일은행은 이달 28일까지 수시입출금 외화예금인 '초이스외화보통예금'에 가입하면 3개월간 연 2.2%의 특별금리를 적용한다. 달러 예금뿐만 아니라 달러 채권, 달러 보험 등도 달러에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