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헌 금감원장, 김상조 공정위장

지난 11일 오후 정부서울청사 금융위원회 대회의실. 최종구〈아래 큰 사진〉 금융위원장이 삼성생명, 한화생명, 미래에셋대우, 현대캐피탈, 롯데카드 등 내로라하는 대기업 금융계열사 사장 7명을 앉혀두고 인사말을 건넸다. 최 위원장 목소리는 온화했지만 업계 대표들은 긴장하는 기색이었다.

이날 정부는 그룹별 금융계열사 전체의 자본 비율을 공개하고 추가 규제 계획까지 밝혔다. 자본 비율은 특정 대기업 금융사에서 손실이 났을 때 이를 그룹 내에서 흡수할 수 있는 자본(적격자본)을 계열사별로 요구되는 자본의 합(필요자본)으로 나눈 값인데, 100%를 넘기라는 게 정부 요구다. 조사 결과 7개 대기업그룹 모두 100%를 넘겨 한숨을 돌렸다. 하지만 금융계와 재계에선 "당국이 근거 없이 규제를 밀어붙인다"며 불만이다.

◇대기업 금융계열사, 2년째 법에도 없는 규제받고 있어

대기업 계열의 보험사나 카드사, 캐피털사 등은 다른 금융사와 똑같은 자본 규제를 받는다. 그런데 금융위는 여기에 추가로 특정 대기업 계열 금융사들의 부실을 막는 자본 규제가 필요하다며 작년 7월부터 '금융그룹 감독제도'를 도입했다. 이런 규제가 있어야 한다는 말은 꽤 됐다. 6년 전 당시 동양그룹이 돈을 융통하려고 회계장부를 조작해 계열 금융사들을 통해 자사 기업어음(CP)을 팔아 4만명이 넘는 피해자가 나왔던 게 계기였다. 이후 특정 대기업그룹이 금융사를 이용해 자금을 끌어대거나, 특정 계열사의 주식을 과도하게 보유했다가 그룹 전체가 부실해지는 위험을 막자는 논의가 당국 안팎에서 꾸준히 나왔다. 미국, 유럽연합(EU) 등이 2000년대 초반부터 비슷한 규제를 하고 있고, 국제통화기금(IMF)도 우리나라에 금융그룹 감독 제도의 도입을 권했다. 그러다 현 정부 들어 금융위가 적극 나서면서 도입된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급하게 규제를 만들다 보니 아직도 그 근거가 법도, 시행령도 아닌 '정부의 권고(모범 규준)'라는 사실이다. 현재로선 해당 기업이 지키지 않아도 제재 수단이 없다. 하지만 금융계에선 "요즘 같은 분위기에서 금융위가 지키라는 말을 안 들을 대기업이 있겠냐"는 말이 나온다. 말만 시범 시행이고 권고지, 사실상 법이나 같아 일종의 '관치'로 해석됐다.

금융위는 작년 모범 규준을 시행하면서 국회에 제출된 금융그룹감독법안(박선숙·이학영 의원 등 발의)이 통과하면 시행에 논란이 없을 것이라고 봤다. 하지만 야당의 반대가 거세 입법이 미뤄졌다. 이 때문에 법에도 없는 자본 규제가 2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 금융위는 일단 모범 규준을 1년 연장했다. 금융위 관계자는 "현 정부 국정 과제이고, 정부와 여당의 입법(立法) 의지가 강해 강제성 있는 규제에 나서기 전에 업계와 당국이 준비하자는 취지"라고 했다.

◇'금융 집중 위험 관리' vs '특정 대기업 손보기' 논란 치열

정부는 "그동안 재벌 그룹들이 그룹 금융사를 동원해 자금 조달 창구로 활용하거나, 특정 계열사를 지원했다가 부실화된 일이 적지 않다"며 시행에 강경한 입장이다. 정부 내에서 금융위는 물론 김상조 공정위원장이나 윤석헌 금융감독원장도 의지가 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오너에 권력이 집중된 대기업그룹의 금융계열사 부실을 막는 금융 집중 위험 방지는 해외에서도 이미 일반화돼 시행되는 제도"라고 했다.

그러나 법제화에 반대하는 야당과 기업들 사이에선 이 제도가 특정 대기업그룹을 손보려는 악성 규제가 될 수 있다는 반론이 거세다. 대기업의 금융 위험을 막자면서 실제론 삼성이나 미래에셋 등 특정 그룹을 표적 삼는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금융위가 시행 중인 금융그룹 감독 제도 가운데 자금이 특정 분야에 과도하게 쏠리지 않도록 하는 '집중(集中) 위험' 관리는 삼성생명과 삼성화재가 삼성전자 지분 28조원어치를 가진 삼성그룹을 겨냥한 것이고, 대기업 내 특정 금융계열사의 부실이 다른 금융계열사로 번지지 않도록 하는 '전이(轉移) 위험' 관리는 지분 관계가 복잡한 미래에셋에 특히 불리하다는 게 금융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대형 금융사 고위 관계자는 "금융그룹 감독 제도가 회사별 자본 규제와 중복되는 데다, 법에 근거도 없이 그룹별로 자본 비율을 공표하면 회사로선 그에 따라 평판이 떨어질 우려를 걱정해야 한다"고 했다. 다른 대기업 계열 금융사 임원은 "(당국이) 모범 규준은 그대로 시행하면서 정작 국회에서는 금융그룹감독법안이 논의조차 되지 않는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