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기술 학회인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가 중국 통신업체 화웨이 소속의 과학자와 엔지니어들을 논문 심사위원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IEEE는 160여국 42만3000여명의 회원을 둔 공학자 단체로, 통신 기술에서 나노 기술, 인공지능(AI)에 이르는 모든 테크놀로지 분야의 표준을 주도한다. 화웨이 배제의 이유는 미국 정부의 제재다. 화웨이는 같은 이유로 최근 IT(정보기술) 분야 표준 기구들에서 배제된 바 있다. 미·중 무역전쟁이 각국 정부, IT산업계에 이어 과학기술계까지 확산하고 있는 것이다.

IEEE는 화웨이 소속이라도 논문 심사 외에 다른 학회 활동은 자유롭게 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향후 논문 투고는 물론이고 기술 표준 제정 과정에서도 화웨이 소속 공학자들을 제외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중국이 주도하던 5세대(5G) 이동통신 기반의 '스마트 시티' 등 첨단기술 상용화도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200여 학술지서 화웨이 심사위원 퇴출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30일 "IEEE가 '심각한 법적 문제로 더 이상 화웨이 소속 과학자들이 기술 논문을 심사할 수 없게 됐다'고 학회가 발간하는 200여 학술지의 편집자들에게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전날 학회가 소속 회원들에게 보낸 메모에 따르면, 화웨이 과학자들은 미국 정부의 제재가 해제될 때까지는 편집자 지위는 유지할 수 있지만 논문을 다룰 수는 없다. 앞서 지난 15일 미국 상무부는 화웨이와 미국 기업 간 거래 금지 조치를 내렸다. 중국 언론들은 IEEE가 발간하는 한 학술지의 편집장인 MIT 교수가 다른 편집자들에게 보낸 이메일 사본을 공개했다. MIT 항공공학과의 아이탄 모디아노 교수는 메일에서 "IEEE 지침을 따라야 한다"며 "논문이 화웨이 출신 심사위원에게 배정됐다면 다른 심사위원으로 바꾸길 바란다"고 했다.

화웨이, 한국에 5G 연구소 개소… 통신 3사 임원들 불참 - 보안 이슈로 미국의 전방위 공세를 받고 있는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가 30일 서울 중구에 있는 화웨이코리아와 같은 건물에 ‘5G(5세대이동통신) 오픈랩’을 개소했다. 사진은 이날 화웨이코리아 사무실 입구 모습. 개소식은 비공개로 진행했다. 국내 통신 3사 임원이나 정부 고위 인사는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과학기술계에서 특정 기업 출신을 학술지의 심사위원에서 배제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IT 학계에서는 IEEE의 화웨이 심사위원 배제는 화웨이와 그 계열사들이 미국의 첨단 기술에 접근할 수 없도록 한 미국 상무부의 조치를 준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논문이 출판되면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심사위원은 아직 출간되지 않은 논문도 심사 과정에서 사전에 볼 수 있다. 또 심사위원은 논문 저자들에게 심사에 필요한 비공개 정보를 추가로 요구할 수도 있다. 이 때문에 미국 정부가 기술 유출의 근원지로 의심하는 화웨이 직원들이 국제학술지의 논문 심사위원을 맡을 수 없다는 주장이 나왔다.

◇중국의 5G 기반 스마트 시티 전략 차질

이번 IEEE의 결정은 첨단 기술 분야에서 화웨이의 입지를 크게 위축시킬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IEEE의 조치는 5G 이동통신 장비 공급과 인공지능 교통망을 갖춘 '스마트 시티' 개발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하려던 화웨이의 계획에 타격을 입혔다"고 분석했다. IEEE는 1963년 미국전기기술자협회와 라디오기술자협회가 통합하면서 출범했지만 현재는 전 세계 공학자를 총괄하는 국제기구로 성장했다. 전기전자공학과 컴퓨터과학 분야에서 발간되는 논문의 30% 이상이 IEEE 계열 학술지에서 나온다. 이 때문에 화웨이는 그동안 IEEE와 협력관계를 수립하는 데 공을 들여왔다.

국제 표준을 정하는 기관들도 화웨이를 배제하고 있다. 와이파이(WiFi·무선인터넷)연맹은 지난 25일 화웨이의 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SD메모리카드 관련 표준기구인 국제반도체표준협의기구(JEDEC)도 화웨이를 퇴출했으며, 다음 순서는 블루투스(근거리 무선통신)협회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국제전기전자공학회(IEEE) (Institute of Electrical and Electronics Engineers)

160여국 42만3000여명의 회원을 둔 세계 최대의 공학자 단체. 1963년 미국전기기술자협회와 라디오기술자협회가 통합해 출범했다. 200여종의 국제 학술지를 발간하며 나노 기술에서 인공지능(AI)에 이르기까지 전기전자공학 관련 기술 표준을 주도한다. 전기전자공학, 컴퓨터 과학뿐만 아니라 물리학, 수학 같은 기초과학 전공자도 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