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에 대한 부정적 사회 인식과 정부의 여러 규제 앞에서도 꿋꿋이 성장해 온 한국 게임 업계가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뚜렷한 새 히트작이 실종된 가운데 올해 1분기 주요 업체들의 수익이 대부분 뒷걸음질쳤다. 최대 시장인 중국에서마저 한국 게임의 입지가 계속 좁아지고 있다. 이번 주 열리는 세계보건기구(WHO) 총회가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지정하면 게임 산업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국내 최대 게임 업체 넥슨이 매각 결정 이후 5개월째 인수 후보를 찾지 못하는 것도 분위기를 어둡게 하고 있다. 업계에선 "올해가 한국 게임 산업의 태동 이래 가장 큰 '도전의 해'가 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신작 실종에 중국 짝퉁까지, 실적에 직격탄

게임 업계에 울려 퍼진 '경보음'은 이른바 '빅3' 게임 업체들의 실적 발표부터 시작됐다. 엔씨소프트의 1분기 영업이익(795억원)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1% 감소했다. 넥슨은 9489억원의 분기 최대 매출을 기록했지만, 영업이익(5367억원)은 3.9% 줄었다. 넷마블도 54.3% 줄어든 339억원에 그쳤다. 같은 기간 웹젠(-62%), 펄어비스(-55%), 컴투스(-24%), 선데이토즈(-8%) 등도 영업이익이 뒷걸음질쳤다.

넥슨이 올해 출시한 새 모바일 게임 ‘트라하’의 한 장면.

업계는 실적 악화의 원인을 '신작 실종'에서 찾는다. 뚜렷한 신작 없이 기존 게임의 서비스가 장기화하면서 싫증을 느끼는 이용자들이 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시장에서 판호(版號·게임영업 허가) 발급 지연도 실적 악화를 부추겼다. 지난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한국의 게임 '플레이어언노운즈 배틀그라운드'(이하 배그)는 최근 중국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당했다. 중국 당국이 1년 넘게 이 게임에 판호를 내주지 않는 사이 중국 업체 텐센트가 유사한 '짝퉁' 허핑징잉(和平精英)을 내놓고 흥행몰이를 했기 때문이다. 한 게임업계 관계자는 "배그 모바일과 허핑징잉은 캐릭터나 배경이 거의 똑같은 수준"이라며 "중국 당국이 한국 게임에 일부러 판호를 내주지 않으며 자국 업체에 베낄 시간을 준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세계보건기구는 20일(현지 시각) 스위스에서 열리는 총회에서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 개정안에 게임 중독을 질병으로 지정하는 안을 포함했다.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최근 내놓은 보고서를 보면 이 개정안이 통과될 경우, 게임 산업에 대한 세계적 규제가 강화되면서 2023년부터 3년간 한국 게임 산업이 입게 될 경제적 손실은 최대 11조원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 게임 산업의 성장을 주도해 온 MMORPG(다중 접속 역할 수행 게임)는 게임 이용자들이 장시간 캐릭터를 육성하는 방식의 게임이다. 게임 시간이 길고, 유료 아이템을 구매해야 해 중독성이 강하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신작 출시로 정면 대응…제도적 지원 절실

게임 업계는 위기 탈출을 위해 다양한 신작 출시에 골몰하고 있다. 좋은 게임으로 이용자들을 붙잡는 '정공법' 외에는 별다른 수가 없다는 것이다.

넷마블은 다음 달 방탄소년단(BTS)을 활용한 스토리텔링형 육성 모바일 게임 'BTS월드'를 출시한다. 이용자가 매니저가 돼 방탄소년단 멤버를 키우는 게임이다. 엔씨소프트는 이달 말 일본 시장에도 '리니지M'을 출시할 예정이다. 리니지M은 이 회사의 대표 게임 '리니지'의 재미와 감성을 살리면서 최신 모바일 기기에 맞게 게임 내용을 업그레이드해 국내외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넥슨은 영화 고질라 속 괴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고질라 디펜스 포스'를 이달 중 내놓는다.

그러나 산적한 악재 때문에 실적 반등이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많다. 실제로 지난 15일 넥슨 매각을 위한 본입찰이 다시 한 번 미뤄진 것에 대해 업계에선 "신작의 흥행이 난항을 보이는 데다 중국 판호 발급 지연 등의 악재가 겹치며 시장에서 매각가를 부담스럽게 여긴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획일적인 '주 최대 52시간 근무제'는 반등을 노리는 게임 업체들의 앞을 가로막는 복병(伏兵)이다. 한 중견 게임 업체 대표는 "새 게임을 개발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는 시스템·소프트웨어 오류 등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많고, 협업을 위해 여러 팀이 장시간 함께해야 하는 상황도 많다"면서 "하지만 현행 주 52시간제하에서는 이런 식의 업무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했다. 특히 모바일 게임의 경우 서비스 수명이 짧아 빠른 개발과 출시가 관건인데 주 52시간제로 게임 출시를 제때 맞추지 못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업계 관계자는 "악재가 겹친 게임 산업의 생존을 위해 특히 주 52시간제 등에 대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업무 특성을 감안해 탄력근로제뿐 아니라 선택근로제 정산 기간을 1년으로 연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