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조선]
42조원 시장, 기업에서 활용
분석보다 감정의 세계
시청각보다 큰 각인 효과

향기가 가득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전시회장 내부.

‘사람의 손을 덜 탄 숲길을 홀로 걷고 있다. 대나무 그리고 이끼 낀 지면과 다른 나무에서 풍겨오는 냄새. 이곳은 비밀의 화원이다. 이것은 완성된 그림이다. 아니, 자연의 목소리다.’ 5월 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오는 19일까지 열리는 ‘한국의 정원전(展)-소쇄원, 낯설게 산책하기’ 전시장에서 떠오른 이미지다.

전시회는 특별했다. 최아름 아이센트 대표(향기 감독·Scent Director)가 디렉팅(감독)한 대나무 향을 베이스로 한 상쾌한 향기가 전시장을 감쌌다. 향기 디렉팅이란 공간에 어울리는 향을 개발하고 곳곳에 퍼지게 하는 작업을 뜻한다. 전시장 초입에는 종이로 만든 대나무숲과 한국의 정원을 소재로 만든 비디오아트 작품이 전시됐다. 이에 더해 향기도 본격적인 예술 작품으로 소개됐다. 향기는 음악처럼 눈에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한 감흥을 선사했다.

전시장 입구와 출구에는 가로세로 약 40㎝ 크기의 검은 사각형 모양의 ‘발향 디바이스’가 설치돼 향을 뿜어내고 있었다. 최 대표는 "관람객이 산책길에서 은은한 향기를 맡은 경험을 마음속 깊이 간직할 수 있도록 향을 디렉팅했다"고 설명했다. 실제로 전시장을 방문하고 일주일이 지나도록 전시장의 풍경과 향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많은 조향사(調香師·향을 만드는 사람)는 향기를 ‘기억’이라고 압축적으로 정의한다. 이는 향기의 각인 효과가 강하다는 뜻이다. 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1986)’는 이런 효과에 대한 우화다. 주인공 그루누이는 냄새(체취)가 없는 인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후각이 매우 발달해 세상의 모든 냄새를 기억한다. 그는 아름다운 체취를 갖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죽은 자의 향을 빼앗아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향수를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는 그 향수를 본인 몸에 뿌리자마자 목숨을 잃는다. 그가 만든 향기가 너무 사랑스러워 사람들이 그를 산 채로 잡아먹어 버린 것이다. 어릴 적 같이 살던 할머니의 체취를 성인이 돼도 기억하는 것 또한 향기의 각인 효과 때문이다.

향기의 효과에 대한 연구는 역사가 깊다. 소설 향수의 창작 동기가 된 프랑스 역사학자 알랭 코르뱅의 저서 ‘악취와 향기(1982)’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향기는 공기 중의 위험을 포착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시각과 청각에 비해서는 푸대접을 받았다. 현대에 들어서 향기는 뇌과학적으로 기억에 각인되는 효과가 큰 것으로 판명됐다. 특히 시청각이 ‘분석’의 영역이라면 후각은 ‘감정’의 영역으로 분류된다. 뇌과학자들은 "향기는 무의식에 큰 영향을 준다"고 입을 모은다. 레이첼 허츠 미국 브라운대 심리학과 교수는 "후각은 다른 어떤 감각보다 본능적이면서 우리 감정을 자극한다"라며 "이는 오감 중 오직 후각만이 감정을 제어하는 뇌의 변연계(limbic system)와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라고 설명했다. 뇌과학자인 문제일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는 "시청각 정보는 주로 분석에 이용되는 반면, 후각 정보는 감정을 자극한다"라며 "마케팅에 향기를 도입하는 이유는 소비자가 감정적인 결정을 내리기 쉽게 만드는 환경을 조성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에 따라 향기는 기업 브랜드를 각인시키는 마케팅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세상에 유일무이한 시그니처(그 회사에서 특별히 제작한 제품) 향은 고객에게 브랜드를 각인시키기 좋은 수단이다. 1921년 생산돼 100여 년간 판매되고 있는 프랑스 패션 브랜드 샤넬의 전설적인 향수 ‘넘버 파이브(No.5)’가 대표적인 사례다. 이 향은 고급스러우면서도 고전적인 패션을 추구하는 샤넬 브랜드의 정체성을 상징한다. 샤넬 이후 다른 패션 회사들도 각각의 시그니처 향을 개발했다.

특히 지각전이 효과이론에 따르면 한 감각기관이 받은 자극은 상호 연결된 다른 감각기관에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좋은 향을 맡으며 식사하면 음식 맛이 배가되는 효과가 있다. 식품 회사 던킨도너츠는 이런 이론을 근간으로 버스 라디오 광고가 나오는 시간에 맞춰 버스 안에 커피 향을 풍기는 마케팅을 시도했다. 또 여행 중 공항 출국장에서 맡는 첫 냄새는 도시의 첫인상을 좌우한다. 인도의 매연 섞인 카레 향, 동남아시아의 전통음식 향이 섞인 냄새가 대표적이다. 이에 따라 국내외 일부 공항과 항공 업계는 적극적으로 향기 마케팅을 하고 있다.

이 밖에도 대표적인 향기 마케팅 분야는 패션, 호텔, 자동차 등이 있다. 최근에는 리테일숍(소매 판매점)을 넘어 프리미엄 빌딩, 영화관, 자동차전시장(모터쇼), 병원 및 요양시설 등 다양한 공간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통신기술(IT) 업계 일각에서는 스마트폰으로 냄새를 감지하는 기능도 개발하고 있다.

◇42조원 달하는 글로벌 향기 산업

향기 산업은 소득 수준 향상과 함께 성장하는 특성이 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보다 나은 환경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글로벌 향기 산업의 매출액 규모는 2012년 229억달러(약 27조원)에서 2017년 266억달러(약 31조원) 규모로, 19.2% 성장했다. 올해 말에는 355억달러(약 42조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국내 향기 시장도 성장세다. 산업통상부에 의하면 국내 향기 시장은 매년 평균 10%씩 확대되며 2014년 2조5000억원을 거쳐 2017년에는 3조원에 달했다. 올해는 3조원 이상의 시장이 열릴 전망이다. 업계 관계자는 "향기산업은 향료, 향수, 탈취제, 방향제, 아로마테라피 등 분야가 매우 다양한 관계로 조사기준에 따라 규모가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 한국프랜차이즈학회의 ‘향기 마케팅의 매장 적용 효과에 관한 연구’ 논문에 따르면 향기 마케팅을 적극적으로 실시한 화장품 매장의 고객 1인 평균 매출액은 8438원으로 그러지 않은 경우보다 약 30% 커지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최근 관련 산업의 트렌드는 향기를 확 키우거나 반대로 냄새를 완전히 없애는 것이다. 호텔·패션·뷰티·요식 업계가 전자라면, 무취전자담배, 무풍에어컨, 에어드레서를 만드는 전자 업계와 섬유탈취제를 만드는 가정용품 업계 등은 후자다. 눈으로는 볼 수 없는 향기를 시각으로 표현하려고 노력하는 분야도 있다. 글로벌 향수 회사들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향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지면광고 등에 활용한다. 향기는 예술과 밀접한 분야이기도 하다. 한 조향사는 "향기는 예술이다. 그리고 돈도 된다. 우리는 항상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말했다.

향긋한 봄이다. ‘이코노미조선’이 향기를 활용한 다양한 비즈니스와 기업 마케팅에 주는 시사점을 알아봤다.

◇plus point

미국과 프랑스가 양분한 조향사의 리그

현존하는 세계최고의 조향사로 꼽히는 프랑스의 알베르토 모리야스가 시향하고 있다.

세계적인 조향사들의 리그도 있다. 우선 ‘현대 향수의 개척자’로는 프랑스의 에드몽 루드니츠카가 꼽힌다. 1905년에 프랑스에서 태어나 1996년에 별세한 그는 명품 업체 에르메스의 첫 번째 향수인 ‘오 데르메스(Eau d’Hermes)’를 만들어 명성을 얻었다. 이후 크리스티앙 디오르의 ‘디오리시모(Diorissimo)’ 등 현재도 생산되는 명품 향수를 줄줄이 선보이며 개가를 올렸다. 샤넬의 전설적인 조향사 자크 겔랑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조향사 가문인 겔랑가 출신이다. ‘파란 시간’ ‘야간 비행’ 등 시적인 이름의 명품 향수로 유명하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현재도 왕성히 활동하는 국제적인 조향사들은 주요 활동 무대에 따라 크게 미국 계열과 프랑스 계열로 나뉜다. 미국 계열은 ‘장미향의 대가’ 소피아 그로스만, ‘퍼퓸 마스터’ 카를로스 베나임이 유명하다. 프랑스 계열로는 알베르토 모리야스와 크리스토프 로다미엘이 유명하다.

현존하는 최고의 조향사로는 흔히 알베르토 모리야스가 꼽힌다. 1950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그는 캘빈 클라인의 ‘시케이 원’, 겐조의 ‘플라워’, 불가리의 ‘옴니아’, 조르지오 아르마니의 ‘아쿠아 디 지오’ 등 국내에서도 익숙한 베스트셀러 향수를 만든 주인공이다. 그는 천연 향과 화학 향을 혁신적으로 조합하는 스타일로 알려졌다. 정확한 향을 찾기 위해 수백만 가지의 다른 조합을 끊임없이 실험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때로 큰 성공은 향기가 불완전할 때 나온다"는 말을 남겼다.

크리스토프 로다미엘은 ‘핫한’ 조향사다. 그는 랄프 로렌, 버버리, 톰포드, 에스티로더 등 지난 20년간 유명 브랜드들과 협업했다. 특히 그는 향을 통한 공간 연출에도 일가견이 있다. 2007년에는 당시 개봉한 영화 ‘향수’ 장면에 맞춘 15가지 고급스러운 향기를 선보였다. 2009년에는 미국 뉴욕 구겐하임박물관에서 ‘향기 오페라(Scent Opera)’를 발표하기도 했다.

업계 관계자는 "유명 조향사들은 2년에 한 번씩 프랑스 니스와 미국 마이애미에서 번갈아가며 열리는 ‘WPC(World Perfumery Congress·세계 향수제조 회의)’에 총집합한다"라며 "국내 유명 조향사들도 이 행사에 참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이 행사는 지난해 6월 니스에서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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