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수퍼 을(乙).’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 업체 ASML을 일컫는 수식어다. 일반적인 장비 업체는 갑(甲)의 제품 구매에 목을 맨다. ASML은 다르다. 세계 1위 파운드리(위탁생산) 업체 대만 TSMC와 2위 삼성전자가 서로 "내게 장비를 달라"며 줄을 서는 형편이다.

두 업체가 원하는 설비는 극자외선(EUV·Extreme Ultra Violet) 노광(Lithography) 장비 ‘NXE’다. 7나노(nm) 이하 반도체 초미세화 과정에 필수적으로 사용되는 이 장비는 ASML이 독점 생산한다. 연간 생산량은 30대 남짓으로, 대당 가격은 2000억원에 육박한다고 알려져 있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7나노 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ASML의 EUV 스캐너.

삼성전자는 지난 24일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 12년간 133조원을 투자해, 2030년 파운드리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계획을 내놓기도 했다. 삼성전자(005930)는 현재 TSMC와 7나노를 넘어 5나노를 향한 치열한 초미세공정 경쟁을 펼치고 있다. 초미세공정을 향한 두 회사의 경쟁은 곧 ASML 장비 ‘역(易) 수주전’이기도 하다. 일례로 TSMC는 올해 ASML이 생산하는 EUV 장비 30대 중 18대를 미리 구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ASML은 어떤 회사고, EUV란 무엇이길래 각각 대만과 한국 시총 1위인 두 ‘반도체 공룡’이 달려드는 것일까.

◇ EUV, 파장 길이 기존 14분의 1 ‘초미세 공정’... ASML 독점 생산

ASML은 네덜란드에서 1984년 설립된 반도체 노광(Lithography) 시스템 세계 1위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은 109억유로(약 14조900억원)에 달한다. 총 임직원은 2만3000여명으로, 한국에는 1996년 진출해 1300여명이 일하고 있다.

ASML이 생산하는 반도체 노광 장비는 빛을 이용해 미세한 전자회로를 반도체 웨이퍼(Wafer)에 그려 넣어준다. 따라서 반도체 공정이 미세화 될수록 노광 장비가 쏘는 빛의 파장도 짧아져야 한다. 반도체는 공정이 미세할수록 칩 크기와 전력 소모가 줄고, 같은 면적에 더 많은 집적회로를 넣을 수 있는 만큼 성능도 개선된다. 수많은 반도체 업체들이 미세공정화에 사활을 거는 이유다.

과거 반도체 회로선폭이 0.13마이크론(μm)~90나노 수준이던 때는 파장 길이가 248나노인 ‘KrF(불화크립톤)’를 광원으로 썼다. 90나노부터 40나노까지는 파장이 193나노로 더 짧은 ‘ArF(불화아르곤)’를 사용했다. 이후 10나노 공정까지는 렌즈를 물에 적셔 굴절률을 높이는 액침(Immersion)과 회로를 2~4번 나눠서 그리는 ‘멀티패터닝’ 등을 이용해 불화아르곤이 지닌 한계를 극복해왔다. ASML은 이 액침 공법을 2004년 세계 최초로 개발하기도 했다.

그러나 액침·멀티패터닝도 7나노 공정부턴 한계를 맞고 있다. 더 짧은 파장을 지닌 광원이 필요해진 것이다. EUV는 반도체 업계가 찾은 차세대 광원이다. EUV는 파장이 ArF 14분의 1 수준인 13.5나노에 불과해 10나노 이하 초미세공정을 무리 없이 실현할 수 있다.

반도체 노광장비 광원은 파장이 짧을 수록 더 세밀한 선폭을 구현할 수 있다.

당장 EUV가 쓰일 분야는 저전력·고성능을 요구하는 7나노 CPU·모바일AP 등이다. 그러나 반도체 업계는 D램도 갈수록 공정이 미세화되고 있는 만큼, 차세대 D램 생산에도 EUV가 쓰일 것으로 본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주요 D램 생산 업체들은 액침불화아르곤 기법으로 38나노를 구현한 후 이를 두번 그려 1X(18~19)나노 D램을 생산해왔다. 그러나 1Z(16)나노 이후 초미세공정에선 이 방식이 한계를 맞을 것으로 예상된다.

◇ 新공정 따른 생산량 증대도 기대… "올해 EUV 원년 된다"

반도체 업계는 올해를 ‘EUV 원년’으로 보고 있다. 실험 생산 수준에 머물던 EUV 공정이 올해부턴 본격 양산에 투입되기 때문이다. 초기 시간당 웨이퍼 34장 정도를 처리했던 ASML EUV 장비의 생산 속도는 최근 시간당 155장 수준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시간당 웨이퍼 100장을 처리할 수 있는지를 양산의 기준점으로 보는 만큼, 기술이 충분히 성숙했음을 알 수 있다.

반도체 업계는 EUV 도입이 공정 미세화는 물론, 생산량에도 긍정적인 효과를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한 관계자는 "멀티패터닝 방식을 사용하면 회로를 여러 번 그려야 하기 때문에 생산 속도가 떨어지고, 자연히 생산량도 줄어들게 된다"며 "EUV를 사용하면 미세공정 실현은 물론 생산량 증대도 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ASML 관계자는 "2010년대 중반부터 오랜 투자와 실험을 거친 EUV가 드디어 소비자 손에 실제 제품을 안겨줄 수 있게 된 만큼, 2019년은 ASML과 반도체 업계에 기념비적인 한 해라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