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앞으로 12년간 133조원을 비(非)메모리 반도체 분야에 투자해 2030년 세계 비메모리 시장 1위에 오르겠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삼성은 현재 메모리(저장용) 반도체 시장에서는 1위지만, 비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는 10위에도 들지 못한다. 비메모리 반도체는 현재 TV·세탁기·냉장고·자동차 등 거의 모든 기기에 들어가는 부품일 뿐 아니라 자율주행차·로봇·드론 등 미래 기술의 핵심이기도 하다. 시장 규모는 메모리의 두 배에 달한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비메모리에서 존재감이 없어 '반쪽짜리 강자'라는 말을 듣는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비메모리 분야에서 계속 뒤처지면 향후 세계 기술 패권 경쟁에서 밀려난다는 위기감에 휩싸여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지난 1월 더불어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와 만난 자리에서 "반도체 시장 위기 극복을 위해 비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적극 육성하겠다"고 말한 바 있다.

◇메모리 반도체 의존 너무 큰 한국

올 들어 메모리 반도체 시장은 악화일로다. 수요 급감에 따라 가격이 폭락하면서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SK하이닉스의 실적은 급락했다. 또 미국·중국 등은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40% 이상을 차지한 삼성전자에 공공연하게 독과점 규제 압박을 가하는 상황이다. 더 이상 사업을 키웠다가는 역풍을 맞을 수 있다.

여기에 중국은 정부 주도의 메모리 반도체 굴기(崛起·몸을 일으킴)를 통해 강력한 경쟁자로 성장하고 있다. 아직 기술 격차가 있다고 하지만, 중국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반도체 양산에 나서 삼성을 위협할 때까지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반대로 비메모리 반도체는 AI·자율주행차 등의 발전으로 빠르게 커지고 있다. 미국의 인텔·퀄컴 등 반도체 기업은 물론이고 페이스북·구글·아마존, 중국 알리바바 등 IT(정보기술) 기업들은 자율주행차·AI 반도체 등 차세대 비메모리 기술 개발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한국 반도체 산업은 그동안 메모리 반도체 성공에 취해 이런 경쟁에 뛰어들지 못했다"고 말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생태계 육성

삼성전자가 24일 발표한 '반도체 비전 2030'은 대규모 R&D(연구 개발)와 시설 투자로 비메모리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만들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투자 목표는 연평균 11조원으로, 기존 비메모리 반도체 투자의 약 두 배 규모다. 전문 인력 고용 예상 규모는 1만5000여명이다.

투자는 비메모리 반도체의 핵심 분야인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와 시스템LSI(large scale integration·대용량 집적 회로)에 집중된다.

우선 삼성전자는 파운드리 기술 연구개발과 설비 투자에 각각 40조원과 58조원을 쏟아붓겠다고 밝혔다. 파운드리는 애플·퀄컴 같은 기업으로부터 반도체 설계 도면을 받아, 위탁 생산을 해주는 것이다. 대량 생산 능력과 미세 공정 기술이 핵심이다 보니 기존 메모리 반도체 기술도 활용할 수 있다. 삼성 입장에서는 단기간에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는 것이다. 삼성전자는 신규 파운드리 공장도 구축할 예정이다. 삼성 관계자는 "조만간 세계 1위인 대만 TSMC보다 앞선 기술로 반도체를 위탁 생산해 고객사를 늘려나가겠다"고 말했다.

인텔·퀄컴 등 미국 반도체 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시스템 LSI에는 35조원을 투자한다. 시스템LSI는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이미지 센서, 스마트폰용 반도체 등을 말한다. 투자액은 대부분 연구개발에 쓰인다. 삼성은 특히 차세대 통신·자율주행차·AI에 들어가는 반도체를 만들 고급 인력을 대거 육성하겠다는 전략이다. 삼성은 자사 반도체 특허를 중소 반도체 업체가 쓸 수 있도록 지원하는 계획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