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단순미 앞세운 일본 패션, 한국 소비자에 통했다
일본 패션 성장에 국내 패션 시장은 주춤

유니클로의 협업 신상품 출시일, 매장 앞에 긴 대기 줄이 늘어서 있다.

지난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몰 유니클로 매장에서 만난 김모 씨(43)는 여름맞이 쇼핑에 한창이었다. 그의 장바구니엔 어린이용 반소매 티셔츠와 자신의 속옷, 남편을 위한 리넨 셔츠 등이 담겼다. 김씨는 "여러 매장에 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서 가족들의 옷을 저렴하게 살 수 있어서 좋다"며 "가끔 세일하는 옷을 건질 수도 있다"고 했다.

패션업계 불황 속에서도 일본 패션 브랜드의 국내 시장지배력이 높아지고 있다. SPA(제조일괄유통화의류) 브랜드 유니클로는 2018회계연도(2017년 9월∼2018년 8월) 기준으로 1조3732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작년보다 약 11% 증가한 수치다. 영업이익은 2344억원으로 전년 대비 33% 늘었다.

국내에서 단일 브랜드가 4년 연속 1조원 이상의 매출을 기록한 건 유니클로가 처음이다. 국내 패션 대기업으로 구분되는 삼성물산(028260)패션부문(1조7590억원), LF(093050)(1조7120억원), 한섬(1조2992억원)의 지난해 매출과 버금가는 수준이다.

2005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유니클로는 현재 SPA 시장에서 30% 이상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데이즈(5000억원), 자라(3500억원), 스파오(3200억원) 등이 뒤쫓고 있지만, 유니클로를 잡기엔 격차가 크다.

유니클로만이 아니다. 데상트·르꼬끄스포르티브·먼싱웨어 등을 보유한 일본 패션회사 데상트코리아는 지난해 매출 7269억원, 영업이익 678억원을 기록했다. 2001년 국내 시장에 진출한 이래 16년 연속 매출이 신장했다. 애슬레저(운동과 레저의 합성어), 골프 등 다양한 스포츠 라이프스타일에 대응한 결과다.

지난 3월 재개장한 ABC마트 그랜드 스테이지 명동중앙점, 오픈 첫 주말 약 3억원의 매출을 거뒀다.

신발 시장에선 ABC마트가 강세를 보인다. 2002년 국내에 진출한 일본 신발 편집매장으로 2017년 매출 4750억원, 영업이익 365억원을 냈다. 최근 5년간 평균 영업이익률이 10%를 넘는다. 지난달 재개장한 ABC마트 그랜드스테이지 명동점의 경우 오픈 첫 주말 동안 매출 3억원을 달성하기도 했다. 생활용품과 의류 등을 취급하는 무인양품도 지난해 매출 1378억원으로 사상 최대 실적을 거뒀다.

일본 패션 브랜드가 국내 시장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가성비를 내세운 상품이 불황기 소비자들의 소비 욕구를 만족시켰기 때문이다. 유니클로는 제조와 유통을 결합해 가격을 낮추고, 히트텍·에어리즘·플리스 등 계절과 기후를 고려한 기능성 패션을 선보여 전 연령층의 호응을 얻었다.

일본식 미니멀리즘이 현재 트렌드와 맞아떨어졌다는 평도 나온다. 단순하고 정갈한 ‘와비사비(투박하고 조용한 상태를 뜻하는 신조어)’ 문화를 기반으로 한 옷과 생활용품 등이 국내 소비자들의 요구에 부합했다는 것. 일본 여행 인구 증가로 인해 일본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주효했다. 일본정부관광국에 따르면 2017년 방일(訪日) 한국 관광객은 714만 명으로, 2013년 246만명보다 약 세배 늘었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한 ‘일본식 미니멀리즘’을 내세운 무인양품 의류 라인.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유니클로와 무인양품은 수직 계열화된 SPA 시스템으로 원가 경쟁력을 확보했으며, 가성비 높은 상품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호응을 얻었다"라며 "한국과 일본이 가지는 문화적 유사성도 소비자들이 일본 패션을 쉽게 받아들인 이유"라고 말했다.

일본 브랜드의 성장은 국내 패션업계의 지형도를 바꿔놓았다. 유니클로는 국내 SPA 시장을 성장을 이끌면서, 캐주얼 시장의 축소를 초래했다. ABC마트는 신발 유통 시장을 점령했다. 그 사이 국내 패션 시장은 점점 위축되고 있다. 2011년부터 한 자릿수 성장률을 보이던 패션시장은 2017년을 기점으로 성장세가 꺾였다. 한국섬유산업연합회에 따르면 국내 패션시장 규모는 전년보다 0.2% 감소한 42조4300억원을 기록했다.

일부 소비자들이 일본 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지만, 성장세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ABC마트에서 만난 대학생 한모(25) 씨는 "일본 브랜드인지 최근에 알았다"면서 "일본은 싫지만, 한국에선 대체할 브랜드가 없어 그냥 여기서 산다"고 했다. 서 교수는 "Z세대들은 애국심보다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에 더 우위를 둔 소비를 한다"고 설명했다.

올해도 일본 패션 업체들의 전망은 밝다. 유니클로는 교외형 매장을 확충하는 한편, 자매 브랜드 지유(GU)를 새롭게 출시해 성장동력을 확보했다. 데상트코리아는 지난해 부산에 600억원을 투자해 설립한 신발 연구개발(R&D) 센터를 통해 신발 사업을 강화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