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찾아간 미국 제약사 길리어드의 포스터시티 캠퍼스 362동 건물에는 실험실이 줄지어 있었다. 안에는 실험장비의 유리창마다 굵은 펜으로 쓴 화학공식들이 빼곡했다. 사진을 찍으려 하자 안내 직원이 "연구하다가 생각난 아이디어를 메모한 것들"이라며 "모두 회사의 지식재산이니 촬영은 안 된다"고 했다.

낙서같이 휘갈긴 공식들에서 세계 최초의 신종 인플루엔자 치료제 '타미플루'와 에이즈·간염 치료제 '비리어드', C형 간염 치료제 '소발디'와 '하보니'가 탄생했다. 하보니는 2015년 16조원어치가 팔리면서 그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처방된 의약품이었다.

길리어드는 1987년 29세의 의사 마이클 리오던이 창업했다. 모기에 물려 뎅기열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마땅한 치료제가 없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아 직접 치료제를 개발하겠다고 나섰다. 창업 후 줄곧 바이러스를 파고든 끝에 창업 27년 만인 2014년 매출 248억9000만달러(약 28조2600억원)로 처음 세계 10대 제약사에 진입했다. 그해 155년 역사의 화이자를 제치고 미국 처방약 매출 1위 기업에도 올랐다. 시가총액은 2002년 2억 달러(2300억원)로 국내 상위 제약사에도 미치지 못했지만, 지금은 832억달러(94조4900억원)에 이른다.

◇연구원 動線까지 고려해 실험실 설계

길리어드는 1987년 설립 후 15년 동안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레그 알턴 길리어드 사장은 "그래도 투자자들은 연구·개발(R&D)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면서 "증세를 완화하는 약이 아니라, 아예 병을 완치시켜 세상을 바꾸겠다는 비전을 나눈 덕분"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길리어드의 C형 간염 치료제는 60%에 머물던 완치율을 99%까지 끌어올렸다. 약 한 알에 100만원이 넘지만, 첫해 매출이 11조원을 넘었다.

미국 포스터시티에 있는 길리어드 본사 실험실에서 연구원이 신약 후보 물질을 합성하고 있다. 길리어드는 실험실을 만들면서 화학자가 오로지 신약 물질 합성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동선까지 최적화했다.

길리어드는 소수 정예를 표방한다. 1인당 매출은 제약업계에서 압도적 1위다. 약품 생산의 3분의 2를 외주로 돌리고, 회사 전체가 오직 신약 개발을 위한 과학 연구에 몰두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본사가 있는 포스터시티 캠퍼스의 직원 중 과학연구자의 비율은 42%다. 회사가 '과학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물질 설계부터 합성까지 독자적으로 진행한다.

윌 왓킨스 의약화학 부사장은 "실험실을 만들면서 화학자가 오로지 신약 물질 합성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동선을 최적화했다"고 말했다. 약품을 덜고 옮기는 시간까지 아끼기 위해 자주 쓰는 약품은 아예 생맥주처럼 뽑아 쓸 수 있게 했을 정도다. 타미플루를 개발한 김정은 박사는 "1994년 당시 50여명에 불과한 길리어드로 자리를 옮긴 것도 과학자와 그 연구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고 했다.

◇신약 기술 확보 위해 과감한 M&A도

길리어드는 미국 제약산업의 '힘'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국은 세계 제약시장의 40.3%를 차지한다. 세계 50대 제약사 중 17개사를 보유하고 있다. 미국 제약산업의 영업이익률은 23%로, 자국 내 반도체(18.2%), 항공(12.5%), 통신(11.2%), 화학(8.8%), 자동차(4.1%) 산업을 압도한다. 길리어드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은 40.8%였다. 과학 연구 외에도 이를 지원하는 과감한 벤처 투자, 기업 간 인수·합병(M&A)이 미국 제약 산업을 세계 1위로 만들었다.

길리어드는 신약 기술 확보를 위해 지금까지 17번의 M&A를 성사시켰다. 2012년엔 전년 매출(83억달러)보다 더 많은 112억달러(12조7000억원)를 투자해 '파마셋'을 인수했다. '무리한 투자'라며 주가가 폭락했지만, 결국 C형 간염 치료제 개발로 이어져 회사를 급성장시켰다.

길리어드는 최근 이 C형 간염 치료제 매출이 줄어 걱정이다. 알턴 사장은 "약의 효과가 좋아 환자가 급속도로 줄어든 탓"이라고 말했다. 회사는 이번엔 '면역 유전자 치료제'라는 신시장 진출에서 활로를 찾고 있다. 한 번 투입하면 몸 안에서 계속 암세포를 공격해 '살아 있는 항암제'로 불리는 약이다. 이를 위해 2016년 119억달러(13조5000억원)를 투자, 제약 스타트업인 '카이트파마'를 인수했다.

국내 제약사는 모두 '한국의 길리어드'를 꿈꾼다. 임성기 한미약품 회장은 2015년 6조원 규모의 신약 기술수출에 성공한 뒤 "길리어드는 신약 개발로 번 돈을 다시 과학 연구에 투자해 세계 10대 제약사로 성장했다"며 "우리의 본보기"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