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전 어선 2척 빌려 동원산업 창업…세계 1위 참치 기업으로 성장
석유 파동 위기 '냉동 어선' 도입해 해결
대형 어선 '동산호' 통큰 투자로 성장 발판 만들어
북미 최대 참치캔 업체 '스타키스트' 인수
IMF 외환위기 사업 다각화 역발상으로 종합식품기업 도약
항해 중 지은 글 국어교과서에도 실려
정도(正道) 경영 몸소 실천…아들 증여세 63억 자진납부

‘참치왕’ 김재철 동원그룹 회장이 전격 은퇴했다. 1969년 어선 2척으로 동원산업을 설립한지 50년 만이다.

김재철 회장이 1958년 항해사로 근무했던 지남호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동원그룹은 종합식품가공업, 종합포장재,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결실을 거두며 국내 대표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특히 동원그룹은 김 회장의 오랜 노력 끝에 참치 어획량과 참치 가공 부문에서 세계 1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참치’하면 ‘동원’이 떠오를 정도다. 동원그룹에 따르면 현재 60억개가 넘는 참치캔이 팔렸다. 전세계 인구 수와 맞먹는 수준이다. 창업주인 김 회장의 땀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 회장이 회사를 설립한 이후 지금까지 한해도 적자를 낸 적이 없었다는 점도 지난 50년간 그의 노력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김 회장은 1935년 전남 강진군에서 7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958년 국립수산대학(현 부경대) 어로과를 졸업한 후 국내 최초 원양어선인 ‘지남호’에서 항해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년만인 1960년 김 회장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지남2호’의 선장이 됐다. 그는 9년 뒤인 1969년 동원산업을 설립하기 전까지 세계 바다 곳곳을 누비며 어획기술 개발과 어장 조건 연구에 몰두했다. 그가 선장 활동을 하는 동안 해외 수산업계에서는 ‘캡틴 제이 씨 킴(Captain J. C. Kim)’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동원산업 창립 당시 1호 원양어선.

김 회장은 창업 직후 원양어업을 통해 잡은 물고기 전량을 팔아 120만달러 수출 실적을 기록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창업 1년만에 이뤄낸 큰 성과였다.

하지만 창업 4년만에 위기가 찾아왔다. 1973년 10월 제1차 석유파동으로 배럴당 2달러에 불과했던 유가가 1974년에는 11달러, 1975년에는 12달러로 급등한 것. 유가 상승은 원양어업계에 큰 타격을 줬다. 어업 원가 가운데 유류비가 35% 이상을 차지했기 때문이다. 선진국들이 경제수역(200해리)을 선언하면서 어로 활동에 제한이 걸린 점도 사업에 부담이 됐다.

당시 김 회장의 위기 대응 능력은 빛을 발했다. 해외 판매처 중심인 기존 방식을 버리고 가까운 일본 판매 중심으로 전환했다. 일본이 어류 가격이 높았기 때문에 일본에 직접 판매하면 수익성을 높일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먼 바다에서 잡은 물고기의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영하 50도 이하로 급속 냉동할 수 있는 냉동 어선을 마련했다. 당시에는 냉동 기술이 발전되지 않아 신선도 문제 때문에 해외 먼바다에서 잡은 물고기는 가까운 현지에 바로 판매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김 회장은 당시 냉동 기술을 적용한 발상 전환으로 위기를 헤쳐갔다.

김재철 회장이 1975년 대형 공모선 동산호 위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김 회장은 위기 상황 속에서 미래를 본 통큰 투자도 아끼지 않았다. 투자 대상은 동원산업이 1975년 2월 건조한 4500톤급 트롤 공모선 ‘동산호’였다. 그는 대형 어선 건조를 위해 회사 전 자산보다 더 많은 비용을 투입했다. 건조비만 1250만달러가 들었다. 동산호는 3년 뒤 파푸아뉴기니 근해에서 1회 투망에 250톤(당시 약 23만달러) 정도의 어획고를 올리는 밑거름이 됐고, 세계적 참치 회사로 성장하는 발판이 됐다. 1982년에는 참치가공사업으로 사업을 확대해 캔참치를 ‘국민 식품’으로 만들었다.

김 회장의 동산호 투자는 시작에 불과했다. 33년 뒤인 2008년 김 회장은 창업 초기 직접 참치를 납품하면서 미래 목표로 삼았던 북미 최대 참치캔 업체인 ‘스타키스트’를 인수했다. 당시 인수대금만 3억6300만달러에 달했다. 2011년에는 세네갈 통조림 회사 '스카사'도 인수했다. 김 회장의 미래를 본 통큰 투자는 동원그룹이 세계 최대 참치업체로 빠르게 성장한 동력이 됐다.

김 회장은 IMF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에는 사업 다각화로 승부수를 던졌다. 그는 농산물 가공공장, 햄·김치 공장을 준공하는 등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이때 김 회장이 사업 다각화의 기틀을 다져둔 덕에 현재 동원그룹이 종합식품회사로 성장할 수 있었다. 업계 한 관계자는 "바다 사나이가 파도를 두려워하지 않듯이 김 회장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위기를 타고 더 멀리 항해하곤 했다"고 전했다.

김 회장의 번뜩이는 지혜는 독서에서 나왔다. 김 회장은 배에서 보내는 동안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헌책방에서 책을 사 항해 중 쉬는 시간이면 책을 읽고 글을 썼다. 그가 쓴 ‘바다의 자원’ ‘황파를 넘어서’ 등의 글은 1965년 국민학교(초등학교) 4학년 국어 교과서, 1967년 중학교 2학년 국어 교과서, 1970년 실업계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김 회장은 지난해 연세대 특강 연사로 나서 "학자가 아닌 사업가 중에서 초·중·고교 교과서에 글이 실린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재철 회장이 16일 경기도 이천시 동원리더스아카데미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있다.

김 회장은 창업 때 ‘성실한 기업활동으로 사회정의의 실현’ 이라는 사시를 만들고 50년간 정도(正道) 경영을 목표로 해왔다. 대표적인 일화로는 1991년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에게 주식을 증여하면서 약 63억원의 증여세를 자진납부한 일이 있다. 김 회장은 당시 증여세를 자진납부해 모범이 됐지만 자진납부 자체가 워낙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갑작스런 세무조사를 받게 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는 자식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아버지였다. 김 회장은 장남인 김남구 한국투자금융지주 대표를 강하게 키우기 위해 6개월 간 북태평양 명태잡이 원양어선을 타게 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 대표는 파도치는 배 위에서 하루 15시간이 넘는 조업을 감당해야 했다. 차남인 김남정 동원그룹 부회장은 대학을 졸업한 후 참치 공장에서 참치캔 포장 등 바닥부터 일을 배우게 했다. 두 아들 모두 입사 10년이 지나서야 임원이 될 수 있었다.

김 회장은 사업가였지만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는 아낌없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창업 10주년인 1979년에 자신의 동원산업 지분 10%를 출자해 장학재단인 '동원육영재단'을 만들었다. 당시에는 대기업 조차 장학재단을 운영하는 사례가 드물었던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