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당황스럽고 두렵다는 생각까지도 듭니다."

8일 오후 통화 연결이 된 한 국민연금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수탁자전문위) 위원의 목소리는 어두웠습니다. 이날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70세의 나이로 별세한 날입니다.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경영권을 빼앗긴 지 불과 12일 만에 전해진 안타까운 소식이었습니다. 미국에서 폐 질환 치료를 받아오던 조 회장의 건강 상태는 주총 이후 급격히 나빠졌다고 합니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사내이사직 연임이 좌절되자) 충격과 스트레스를 받은 것 같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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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이 이렇다보니 수탁자전문위 위원도 착잡하다는 반응을 보인 겁니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 지분을 11% 넘게 보유한 2대 주주입니다. 국민연금은 이번 주총에서 조 회장 연임에 반대표를 던졌는데, 그 결정을 한 주체가 수탁자전문위 소속 민간 전문가들입니다. 통화를 한 위원은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전혀 예상치 못한 일(조 회장 사망)이 벌어지니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또 다른 수탁자전문위원도 "힘있는 정치인까지 공개적으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가 조 회장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는 식으로 비난하니 당혹스럽다"고 말했습니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전 대표는 8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연금사회주의를 추구하는 문재인 정권의 첫 피해자가 오늘 영면했다. 국민 노후 생활을 보장하라고 맡긴 국민연금을 기업 빼앗는데 악용했다"고 적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소식에 어쩔 줄 몰라하는 건 국민연금공단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국민연금 관계자는 "국민연금의 수탁자책임활동에 대한 여론이 갑자기 나빠지는 걸 느낀다"며 "콜센터로도 간간이 (조 회장 사망에 관한) 항의전화가 걸려온다"고 했습니다.

시장 관계자들은 조 회장 사망의 원인을 국민연금에 무조건 떠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하면서도 "국민연금 스스로 시빗거리를 만들긴 했다"고 입을 모읍니다. 실제로 이번에 수탁자전문위는 대한항공 주총 안건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일부 민간위원의 윤리강령 위반과 과도한 언론플레이로 논란의 불씨를 양산했습니다.

예컨대 민주노총과 참여연대가 추천한 위원 2명은 대한항공(003490)주식을 보유 또는 위임받은 주주라는 사실이 회의 직전 드러났습니다. 이들은 또 특정 기업에 대한 회의 내용을 언론에 낱낱이 제공하거나 개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적는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보도를 유도했습니다. 어떤 위원은 직접 방송 프로그램에 나가 한쪽에만 도움이 되는 의견을 개진하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올해 주총 시즌을 거치면서 국민연금은 주주권 행사의 신뢰도를 상실했습니다. 또 재계는 국내 항공산업을 일으킨 큰 별을 잃었습니다. 돌아오는 다음 주총 시즌은 어떤 모습일까요. 어쩌면 국민연금은 지분율이 10% 남짓한 양측(조원태 사장과 KCGI 측) 사이에 서서 킹 메이커 역할을 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올해보다 훨씬 더 투명하게 의사 결정을 해야 합니다. 올해처럼 씁쓸한 뒷맛만 잔뜩 남긴 채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