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윤철 전 감사원장,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 등 경제계 원로들은 3일 청와대 오찬 간담회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 등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수정·보완을 요구했다. 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좋은 시사점을 준 것 같다"고 했지만, 정책 전환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히 말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2시간 동안 진행된 간담회에서 경제 원로들은 "최저임금 인상 속도가 너무 빨랐다" "노조에도 기업과 같은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라" "소득이 오르면 소비가 진작된다는 발상은 너무 심플하다"며 문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했다. 대선 캠프에 참여했던 박승 전 총재는 "노동계에 포용의 문호를 열어 놓되 무리한 요구에 대해선 선을 그어 원칙을 갖고 대응해 달라"고 했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으로 노동 경직성이 강화됐다"며 "이는 기업의 투자 활성화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3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제계 원로 초청 오찬 간담회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문 대통령부터 오른쪽으로 전윤철 전 감사원장, 정운찬 전 국무총리, 박봉흠 전 기획예산처 장관, 최정표 KDI(한국개발연구원) 원장, 김수현 청와대 정책실장, 주형철 경제보좌관, 윤종원 경제수석, 노영민 비서실장, 이제민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 김중수 전 한은 총재(한림대 총장),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서울시립대 명예교수), 박승 전 한은 총재(중앙대 명예교수).

가장 논란이 많이 된 것은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이었다. 전윤철 전 원장은 "소득 주도 성장은 기업의 이윤을 노동자와 나눠 먹으라는 것인데, 이는 정부가 추진하는 혁신 성장과도 이론적으로 맞지 않는다"며 "기업에 일정한 이윤을 보장해야 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운찬 전 국무총리도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부작용으로 고용이 떨어지면 소득이 오히려 줄어든다"며 "저소득 근로자를 돕겠다는 정책으로 저소득 근로자가 제일 못사는 계층으로 밀려난 경우도 있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전 총리는 "소득 주도 성장은 저소득층을 위한 인권정책은 될 수 있어도 경제정책은 될 수 없다"며 소득 주도 성장 정책의 보완을 요구했다. 박승 전 총재는 "소득 주도 성장의 방향은 맞지만 정책 목표를 달성할 수 있도록 정책 수단이 운영돼야 한다"고 했다.

현 정부의 경제 비전 부재(不在)를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김중수 전 한은 총재는 "경제정책 비전에 대한 공감대를 마련해야 하고, 예측 가능성을 높이는 방식을 통해 국민 역량을 집결해야 한다"며 "임금 상승에 상응해 생산성 향상에 주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 전 총리는 "사회 분위기가 너무 가라앉아 있다. 한국이 나가야 할 길을 큰 틀에서 제시해야 한다"며 "국력 신장, 국격 제고를 위해 남북한 및 해외 동포 등 8000만 국민의 경제 공동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다.

일자리 정책에 대한 고언도 이어졌다. 전윤철 전 감사원장은 "양질의 일자리는 정부가 아닌 기업이 창출하는 것"이라며 "기업의 투자를 촉진할 수 있는 친(親)기업 정책을 추진하라"고 했다.

반면 규제 개혁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강철규 전 공정거래위원장은 "성장 패러다임의 전환이 절실하다"며 "공정 경제의 중요성, 기득권 해소를 위한 규제 강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윤철 전 원장은 "규제 혁파 없이는 기업들이 창의력을 발휘하기 힘들다. 일괄적 규제 혁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한 지적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한 원로는 "대통령이 모든 것을 다하겠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을 하면 안 된다"며 "내각에 과감한 권한을 주고 총리와 경제부총리, 대통령 비서실장이 험한 일에 직접 뛰어들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간담회에서 "격식 없이 편하게 이야기해주시면 우리 경제팀에 큰 참고가 될 것"이라고 했다. 또 원로들의 발언이 끝날 때마다 "좋은 시사점을 주신 것 같다"고 말했다. 2시간의 오찬 간담회가 끝난 뒤 문 대통령은 "국민이 가장 걱정하는 대목이 경제"라며 "정부가 옳은 방향으로 나갈 수 있도록 원로들이 계속 조언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날 원로들의 발언을 있는 그대로 소개하지 않고 내용을 대폭 생략 발표했다. 그래서 정부 정책에 대한 쓴소리를 가감 없이 전달하겠다는 간담회의 취지가 퇴색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 참석자는 "대통령이 귀 기울여 듣긴 했지만, 정책 전환을 검토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