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6일 일본 나가노(長野)현 가미이나(上伊那)군에 있는 올림푸스의 렌즈 공장. 6만㎡(약 1만8000평) 규모 건물은 생산 공장이라기보다는 거대한 '공방(工房)'이었다.

렌즈를 깎는 연마실에 들어서자 머리가 희끗한 기술자가 손톱만 한 렌즈 표면에 뿌연 가공 용액을 뿌리고 있었다. 제조 공정 대부분은 기계가 하지만 마지막 렌즈 표면을 정밀하게 다듬는 연마 작업은 30년 이상 경력의 장인 기술자들이 수(手)작업으로 하고 있었다.

이곳에선 전 세계 연구용 현미경에 들어가는 렌즈의 50%를 만들고 있다. 최상급의 초소형 렌즈는 거의 대부분 이곳에서 만든다. 다나카 다케히로 나가노올림푸스 사장은 "내시경·현미경과 같은 정밀 기기에 들어가는 렌즈는 8나노미터(1나노는 10억분의 1)까지 구분이 가능해야 하는데 이 정도 품질은 아직 기계로는 구현이 어렵다"고 말했다.

나가노(長野)의 올림푸스 렌즈 제조 공장에서 기술자가 렌즈 표면을 살펴보고 있다. 일본 광학 기업들은 100년간 갈고 닦은 렌즈 기술을 활용해 카메라뿐 아니라 내시경·이미지센서·디스플레이 제조 장비에서도 세계 1위에 올랐다.

올림푸스, 니콘, 캐논, 소니 등 일본 광학(光學) 기업은 카메라 시장뿐만 아니라 현미경, 내시경, 이미지 센서, 디스플레이 제조 장비 분야에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100년간 축적된 렌즈 기술이 이룬 성과다. 기계보다 정교하게 렌즈를 깎는 장인의 기술이 빛을 조절하는 광학 기술로 진화했다.

나노미터 단위까지 미세하게 빛을 다루는 이른바 '나노 렌즈' 기술은 일본 광학 기업 4인방이 주도하고 있다. 일본 밖에서는 네덜란드 반도체 장비업체 ASML 한 곳 정도가 거론된다. 일본 모노즈쿠리(혼신을 다해 물건을 만드는 장인정신)가 아직 살아 있음을 광학 기술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광학기술이 올림푸스·소니를 구했다

올림푸스는 현재 매출의 78%가 내시경과 같은 의료 사업에서 나온다. 본업인 카메라(영상 사업)는 8% 정도다. 올림푸스는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 시장 성장이 둔화하면서 식품·유통 등 본업과 관련 없는 분야에 투자했다가 자금난에 빠졌다. 2012년 분식 회계 스캔들까지 겪으며 상장 폐지 위기에 몰렸다. 2013년 사사 히로유키 올림푸스 대표는 "본질로 돌아가자"고 했다. 광학 기술을 활용해 의료용 내시경 사업에 집중 투자했고, 단 2년 만에 예전 매출 규모를 회복했다. 올림푸스는 이달 초 대장암을 진단할 수 있는 인공지능(AI) 내시경을 공개했다. 향후 위암 진단 내시경을 내놓을 예정이다. 니콘도 나노미터까지 구분하는 렌즈 기술로 치아에서 줄기세포를 찾아내 추출하는 기술 개발을 진행 중이다.

2000년 후반 수조원대 적자로 휘청거렸던 소니를 살린 것도 광학 기술이다. 수십년간 TV 1위였던 소니는 당시 삼성전자에 밀리면서 충격에 빠졌다. 소니의 대안은 이미지 센서였다. 스마트폰과 같은 전자기기의 눈을 만드는 것이다. 소니는 이미지 센서 분야 R&D에 4조원을 투자했다. 소니의 한 관계자는 "소니의 핵심 경쟁력은 뛰어난 색감을 구현한 광학 기술"이라며 "광학 기술의 결정체인 이미지 센서는 타사에 질 수 없는 분야"라고 말했다. 소니는 지난해 이미지 센서 시장에서 점유율 52.9%를 기록했다. 소니는 앞으로 자율주행차용 이미지 센서 분야에 10조원을 쏟아부을 계획이다.

◇日 장비 없인 한국 디스플레이 못만들어

한국의 핵심 산업인 스마트폰·디스플레이를 만드는 데 일본 캐논과 니콘의 장비 없이는 사실상 생산이 불가능하다. 디스플레이의 핵심 부품인 박막트랜지스터(TFT)에 빛을 쪼여 회로 패턴을 새기는 공정에 활용되는 노광(露光) 장비는 캐논과 니콘이 세계 시장의 99.9%를 장악하고 있다. TFT와 같은 반도체에 미세한 회로를 새기려면 렌즈를 통해 원하는 곳에 빛을 쏴야 한다. 국내 디스플레이 업체 관계자는 "스마트폰에 쓰이는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패널은 회로 폭이 머리카락보다 가는 0.04㎜로 좁아졌다"며 "고난도의 렌즈 기술을 갖춘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스마트폰용 OLED(유기발광다이오드) 화면 생산에 필수인 증착(蒸着) 장비도 일본산이 대부분이다. 이 장비는 진공 상태에서 발광(發光) 물질을 끓여 유리 기판에 붙이는 역할을 한다.

일본 캐논 자회사인 캐논도키가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장악하고 있다. 대형 유리 기판에 얇은 막을 균일하게 형성하는 압도적 기술력 때문에 기기의 가격이 대당 1000억원 선이지만 삼성디스플레이와 LG디스플레이, 중국 BOE 등 주요 업체들이 줄을 서서 치열한 구매전을 펼 정도다. 권동일 서울대 교수(재료공학)는 "한국은 세계적인 디스플레이 강국(强國)으로 꼽히지만 그 뒤에는 일본 장비업체들이 이들의 생산 일정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