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경기 침체 여파로 빚 갚을 능력이 크게 떨어진 저소득·고령자, 실업자 등 취약 계층을 위해 금융회사 빚을 탕감해주기로 했다. 저신용·저소득층의 빚이 소득의 70%에 육박할 정도로 채무 상환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18일 금융위원회와 신용회복위원회는 기초수급자와 장애인연금 수령자, 70세 이상 고령자, 1500만원 이하 빚을 10년 넘게 못 갚는 연체자 등의 채무 원금을 70~90% 감면하는 내용 등이 담긴 '개인채무자 신용회복지원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빠르면 오는 6월부터 시행된다.

일단 원금을 대폭 깎아준 뒤 3년간 성실히 상환하면 이후 남은 빚도 없애준다. 이렇게 되면 빚을 최대 95%까지 감면받는 효과를 얻을 것으로 정부는 기대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대책에 대해 사회적 약자의 빚 부담을 줄여준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빚 안 갚아도 된다'는 도덕적 해이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체 시작된 실업자, 6개월간 빚 상환 미뤄준다

이번 대책으로 실업이나 휴직, 폐업 등으로 갑자기 소득이 끊겨 연체자가 된 사람들은 최대 6개월간 원금 상환을 미룰 수 있게 된다. 6개월간 이자만 내면 원금 상환은 미뤄주고, 그래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은 채무자는 최대 10년간 장기 분할 상환이 허용된다. 연체 30일을 넘기면 신용 등급이 떨어지고 회생 불능에 빠지는 경우가 많아 '신용 회복 골든타임' 안에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이다.

연체 90일 이후부터 금융회사가 아직 '못 받는 돈'이라고 처리하지 않은 미상각(未償却) 채무 원금도 최대 30% 감면해주기로 했다. 미상각 채무까지 감면해주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통상 금융회사는 연체 6개월에서 1년이 지나야 채권을 상각 처리(장부상 손실 처리)한다.

그러나 금융위는 미상각 채권도 실질적으로 금융회사가 못 받을 가능성이 큰 돈이라고 보고 채무자별 채무 부담을 따져 원금을 감면해주기로 했다. 다만 빚 탕감으로 손실을 보는 금융회사를 위해 원금 탕감분을 세법상 비용으로 처리할 수 있게 기획재정부와 논의 중이다. 이에 대해 금융계는 금융회사들이 대출금 돌려받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0년 넘게 원금 1500만원 이하를 갚지 못한 장기 소액 연체자의 빚은 70% 탕감해준다. 다만 소득이 중위(中位) 소득의 60% 이하이며 재산이 4600만원보다 적은 연체자만 대상이다. 3년간 잘 갚으면 남은 빚도 모두 없애준다.

기초수급자나 장애인연금 수령자, 70세 이상 고령자 중 소득과 재산이 기준치 이하면서 3개월 이상 연체한 사람도 채무 원금을 80~90%씩 깎아주고, 3년간 성실히 상환하면 남은 채무도 면책해준다.

◇'빚 안 갚는 사회' 우려도

이번 빚 탕감 프로그램은 문재인 대통령 대선 공약의 연장선상에 있다. 앞서 정부는 문 대통령 공약대로 1000만원 이하 장기 소액 연체자의 빚을 전액 탕감줬다.

박근혜 정부 때도 1억원 이하 원금을 6개월 이상 연체한 경우 원금을 최대 90% 탕감해주는 등 역대 정부에서 여러 차례 빚 탕감 대책이 나왔지만, 전액 면제해주는 대책까지 내놓은 적은 없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가 계승했다는 노무현 정부에선 신용 불량 상태에 놓인 채무자들에 대해 이자만 탕감해줬을 뿐 원금 탕감은 전혀 없었다.

시장에서는 취약 계층의 재기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좋지만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성실하게 빚을 갚아온 사람들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이번 대책대로라면 700만원의 빚을 진 월 소득 150만원의 고령자가 3년간 다달이 4만7200원만 납부하면 나머지 빚 530만원을 모두 없애주는 식이기 때문이다.

또한 저소득층이라 할지라도 1500만원 이하 장기 연체자에 대해서까지 채무 원금을 70%나 깎아주는 것은 지나친 빚 탕감이며, 결국 내년 총선을 겨냥한 서민 대책이 아니냐는 지적까지 나오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정당한 노력 없이 그저 버티면 된다는 도덕적 해이, 자신의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고 공짜 이득을 얻는 지대 추구 행위가 확산될까 걱정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