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코에서 현대제철로, 신세계에서 롯데로.'

최근 국내 재계에서는 '앙숙'이라던 대기업 간 인사 이동이 화제다. 부장급이나 임원 이동이 아니라 사장, 대표이사급이다. 그동안 중견 기업을 중심으로 삼성 출신 고위 임원 영입이 활발했는데, 최근에는 경쟁 관계인 업계 1·2위 기업 간 최고위급 임원 이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양성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는 시대 변화에 발맞춰 국내 대기업에도 '내부 순혈주의' 탈피 바람이 불고 있다. 특히 현대차, LG 등 국내 주요 그룹이 '새로운 리더십 체제'로 전환됨에 따라 전문성을 갖춘 신선한 외부 인물 영입이 더욱 활발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리더로

현대차그룹은 18일 안동일 전 포스코 포항·광양제철소장을 현대제철의 신임 사장으로 임명했다. 현대제철 창사 이래 포스코 출신이 사장으로 영입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업계 1·2위인 포스코와 현대제철은 국내 시장은 물론 해외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을 벌이는 사이다. 포스코의 '심장'인 포항제철소장을 지낸 고위 임원이 현대제철 사장으로 옮겨간 것이다. 현대제철 측에서는 "안 사장은 제철 설비와 생산 분야의 국내 최고 전문가"라며 "풍부한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생산과 기술 품질 그리고 특수강 부문의 경쟁력을 한 단계 높이는 역할을 맡을 것"이라고 밝혔다.

롯데그룹은 지난 연말 정준호 전 신세계 이마트 부사장을 롯데GFR 대표이사로 임명했다. 롯데와 신세계 그룹은 서로 소송전도 불사할 정도로 유통업계의 유명한 앙숙인데, 대표이사급 이동이 일어난 것이다. 롯데GFR은 패션 부문 등을 담당하는 롯데쇼핑 자회사다. 정 대표가 신세계 시절 '몽클레어' '어그' 등의 브랜드 판권을 국내에 성공적으로 들여온 점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카카오는 지난달 콘텐츠 유통·제작 자회사인 카카오M의 신임 대표로 김성수(57) 전 CJ ENM 대표를 선임했다. 최근 적극적인 인수 합병을 통해 종합 콘텐츠 기업으로 영역을 확장한 카카오M은 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김 대표를 영입해 사업 효과를 극대화할 전략이다.

새로운 리더십, 순혈주의 탈피… 明暗 갈려

보수적이라고 평가받았던 현대차·LG·롯데·포스코 등이 '외부 수혈'에 적극 나선다. 지난해부터 현대차그룹을 사실상 이끌고 있는 정의선 수석 부회장은 정기 공채 폐지, 여성 임원 확대 등 인사 다양성을 추진하고 있다. LG그룹의 새로운 사령탑이 된 구광모 회장은 지난 연말 신학철 3M 수석 부회장과 김형남 한국타이어 연구개발본부장(부사장)을 잇따라 영입했다. 최정우 포스코 회장도 그룹 내 신성장 부문이라는 별도 조직을 만든 뒤, 오규석 전 대림산업 사장을 책임자로 임명했다.

김재호 패스파인더 대표는 "해외 주요 기업은 최고다양성책임자(CDO)를 둘 정도로 순혈주의를 타파하고 인적 구성원의 다양성 확보에 힘쏟고 있다"며 "이러한 조직일수록 생산성과 성과가 높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이렇게 외부 인사가 새 조직에 안착하고 시너지를 낼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국 GM은 지난해 9월 마케팅 총책임으로 합류한 신영식 전 쌍용차 마케팅본부장이 반년도 안 돼 회사를 그만뒀다. 현대제철 신임 사장은 포스코 포항제철소장 1년 만에 해외의 전무급 자리로 옮긴 이력이 있다. 협력업체와 구설이 나돈 게 이유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인재를 영입할 때는 엄격한 검증과 함께 이들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존 조직 내 여건을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