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제조업 메카였던 전북 군산, 경남 창원·거제, 울산 등 공업 지역이 돈줄까지 끊길 지경에 몰리면서 한국판 '러스트 벨트(Rust Belt)'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러스트 벨트는 과거 미국의 대표적 공업 지역이었지만 철강·자동차 등 제조업이 무너지면서 낙후한 중서부·북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텅 빈 공장 - 지난 11일 오후 전라북도 군산산업단지의 중소기업 '씨엠텍' 김형복 대표가 텅 빈 공장을 바라보고 있다. 이곳은 2017년 현대중공업 군산조선소 폐쇄 이후 일감이 뚝 끊겼다. 김 대표는 "수십억원을 들여 마련한 설비들이 죄다 녹슬어가고 있다"면서 "그런데도 일감도 없고, 힘든 상황을 버틸 돈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은행을 포함한 금융회사들이 최근 3~4년간 조선·자동차 등 침체에 빠진 산업을 중심으로 대출을 조이면서 중소기업들이 극심한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다. 정부가 작년 일부 지역을 산업·고용위기지역으로 지정해 "금융 지원을 하겠다"고 했지만 현장의 기업들은 체감할 만한 효과가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은 "명확한 평가와 심사를 통해 기업을 선별하되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지원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원한다더니… 실질적인 도움 안 돼"

지난 11일 군산산업단지에서 만난 기업인들은 현재 어려움을 겪는 기업들이 정부 지원 대상이 되려고 요건을 갖추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지적했다. 박종관 푸른에스엔피 대표는 "최근 전라북도에서 설 긴급 경영자금, 자동차·조선 업체 긴급 자금으로 각각 2억원, 3억원씩 지원해주겠다고 했지만, 결국 (신용보증기금 등에서) 보증서를 끊어서 은행이 승낙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다"면서 "보증 기관에선 '매출액이 떨어지니 보증해 줄 수 없다'는 식으로 나오니 한 푼도 못 받았다"고 했다. 김형복 씨엠텍 대표도 "정부가 산업·고용위기지역으로 선정해놓고 구체적인 후속 조치가 없어서 은행들이 대출을 꺼리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지역도 상황은 비슷했다. 경남 거제시의 한 선박 부품 업체 대표는 "작년 고용노동부나 중앙 부처에서 기업들 불러서 애로 사항을 듣긴 했지만 그 뒤에 별로 달라진 게 없다"고 말했다. 지역 자체가 황폐화되어 기업이 가진 땅이나 기업 주가 등 모든 게 저평가되면서 대출받기가 더 어려워졌는데, 정부는 정책을 발표하고 나면 내일이라도 숨통이 트일 것처럼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지역에선 조선·자동차 등 침체된 업종이라는 이유만으로 은행이 대출을 거절하는 행태를 지적하는 기업도 있었다.

신용보증기금 측은 "수차례에 걸친 기준 개정 등을 통해 지원 대상과 한도를 넓히고 심사 기준을 추가로 완화해 원래 계획보다 보증 지원 한도를 초과해 지원했다"고 반박했다.

◇군산·창원 등 기업들 "올해가 더 걱정"

제조업 메카였던 경남 창원이나 전북 군산의 현재를 보면 중소기업들이 처한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창원은 작년 수출액이 161억달러로 2006년 이후 최저다. 우리나라 수출이 사상 최대를 기록한 것과 정반대였다. 또 창원상공회의소가 작년 3분기 기준 창원 지역 코스피 상장 기업 23개 사의 실적을 집계했더니, 총매출이 2017년 3분기와 비교해 약 8%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체 순이익도 1384억원 흑자에서 752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군산도 마찬가지다. 2011~2013년 400억~600억달러 안팎이었던 연간 수출액은 작년 1~10월 기준 133억달러로 주저앉았다. 실업급여 신청 건수는 작년 1~10월 3만3000건을 돌파해 전년도 기록을 10개월 만에 경신했다. 창원의 한 기업 관계자는 "수출이 줄면서 매출이 떨어져 신용등급이 깎이자,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했다는 이야기가 많이 돈다"면서 "올해를 버틸 수 있을지 두렵다는 상황이라 자금난 소문이라도 날까 서로 쉬쉬하는 분위기"라고 말했다.

◇"옥석 가리되 실질적 도움 되게"

전문가들은 엄정한 평가를 통해 자금난에 빠진 중소기업들에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전망이 괜찮은 기업에는 정부 차원에서 경영난에서 벗어나 재기할 기회를 주는 게 바람직하다"며 "조선·자동차 등 제조업 산업은 전후방 연관 효과가 커서 기업은 물론 지역 경제까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금융기관 부실 가능성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만큼 반드시 회생 가능성을 전제로 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제의 선박 부품 업체 대표 D씨는 "무작정 지원을 바라는 게 아니다"라면서 "정부가 기업 얘기를 실제 들어서 설비 보완이 필요한지, R&D(연구·개발)가 필요한지 손에 잡히는 지원을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