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활동 현금흐름 개선…"브랜드 전략은 부재"

국내 스포츠 브랜드 '르까프'를 운영하는 중견기업 화승이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대주주인 산업은행의 책임론이 불거지고 있다. 산업은행이 화승을 인수한 이후 재고자산을 정리하고 불필요한 점포를 줄이는 등 '산은식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경쟁력을 되찾지 못하고 결국 문을 닫기 직전까지 회사 상황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화승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회사는 당장 살릴 수 있어도 협력업체들에 발행한 1000억원 규모의 어음은 고스란히 협력업체의 손실로 떨어진다.

8일 산업은행과 유통업계에 따르면, 산업은행은 화승을 인수한 2015년 이후 부실 자산을 처리하고 현금흐름을 개선하는 등 재무 구조를 좋게 만드는데 주력했다. 르까프를 운영하는 화승은 2014년에만 해도 매출액 5619억원, 영업이익 155억원을 기록한 견실한 중견기업이었다. 하지만 2015년에 매출액이 2363억원으로 반토막났고, 38억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하는 등 실적이 빠르게 악화됐다. 스포츠 의류 시장의 상승세를 이끌던 고가 아웃도어 시장이 침체기에 들어갔고, 나이키, 뉴발란스 등 해외 유명 스포츠 브랜드가 인기를 끈 영향이었다.

결국 화승은 몇 차례 경영권이 매각되는 과정을 거쳐 2015년 산업은행과 KTB PE가 공동으로 설립한 'KDB KTB HS 사모펀드(PEF)'가 새로운 주인이 됐다. 산업은행은 당시 화승의 주채권은행을 맡고 있었다. 르까프의 브랜드 경쟁력은 충분한 만큼 재무적인 문제들만 해결해주면 화승이 재도약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을 내렸다는 게 산업은행의 설명이다.

산업은행은 화승을 인수한 이후 재무구조 개선에 주력했다. 산업은행 주도로 화승이 보유한 르까프, 케이스위스, 머렐 등 주요 브랜드의 점포에 대해 전수 조사가 이뤄졌고 비효율적인 점포는 정리했다. 산업은행 인수 당시 화승은 재고 관리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정도로 주먹구구로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 부분에 대한 정리도 대대적으로 진행됐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산업은행이 진행한 구조조정은 부실 기업을 인수한 뒤 재고자산을 처분하고 경영 시스템을 개선하는 전형적인 사모펀드식 구조조정이었다"며 "성공했다면 산업은행의 성공 방정식으로 불렸겠지만 스포츠 브랜드의 특성을 제대로 감안하지 못하면서 결국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산업은행의 구조조정이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한 건 아니었다. 화승은 실적이 좋았던 2013~2014년에도 영업활동 현금흐름은 500억원 이상의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실적은 좋지만 속으로는 시름시름 앓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산업은행이 인수한 이듬해인 2016년에는 화승의 영업활동 현금흐름이 플러스로 전환하는 등 재무적인 부분에서는 분명한 성과를 냈다.

르까프가 2015년 배우 이서진을 앞세워 선보인 광고.

문제는 브랜드 고유의 경쟁력이었다. 산업은행식 구조조정은 재무제표를 개선하는 데는 효과가 있지만 스포츠 브랜드의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재고자산을 떨쳐내고 점포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1년여의 기간 동안 화승은 르까프, 케이스위스 등 주요 브랜드에서 새로운 전략을 선보이지 못했다. 이 과정에서 타깃 연령층을 40대로 잡았다가 2030 청년층으로 옮기는 등 혼선을 빚기도 했다. 2016년 11월에는 실내 스포츠 시장을 겨냥한 브랜드로 거듭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는데 르까프의 기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르까프와 비슷한 이미지였던 휠라가 비슷한 시기 브랜드 고유의 정체성에 집중한 '헤리티지(heritage·유산) 상품'으로 회생한 것과 정반대의 행보를 보인 셈이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르까프는 2015년에 배우 이서진을 광고 모델로 기용했다가 2030 청년층을 겨냥한다고 하는 등 제대로 된 브랜드 전략이 없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며 "2018년에는 결국 최고경영자에 재무통을 앉혔는데 법정관리 신청도 그때부터 예고된 셈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