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연휴 근무 중 숨진 고(故) 윤한덕(사진)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장을 향한 추모가 이어지고 있다.

고 윤한덕 센터장은 전남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모교에 응급의학과가 생긴 1994년 ‘1호 전공의’가 된 이후 한 평생 응급의료를 위해 헌신하다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응급의료 전용 헬기 도입, 재난응급의료 상황실 운영, 응급의료기관 평가, 국가 응급진료 정보망 구축 등 국내 응급의료체계를 다지는 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의료현장 동료들이 기억하는 고인은 자기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성격의 소유자였지만, ‘우리나라 응급의료’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치열한 토론자였고, 꼼꼼한 원칙주의자였다.

20년 넘게 윤 센터장을 알고 지낸 대한응급의학회 이사장 홍은석(56) 울산대병원 응급의학과 교수는 "불과 며칠 전에도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응급의료 현황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를 했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홍 교수는 "그날도 늦게까지 국내 응급의료 현황에 대해 치열한 토론을 벌였다"며 "윤 센터장은 국민을 위한 응급의료정책에 대해서는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원칙주의자였다"고 말했다.

그는 "윤 센터장은 집단과 집단 간의 이해 충돌이 있을 때도 ‘국민을 위한다’는 점에서 주장을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인 윤 센터장과 외과 전문의인 이왕준 명지의료재단 이사장은 지난 10여년간 응급의료정책의 중요 이슈가 생기고 정책 전환의 고비 때 마다 머리를 맞대고 숙의를 해왔다.

이왕준 이사장은 "작년 12월 통화하면서 설 지나 술 한잔 하자 약속했었다"면서 "그 때 내가 윤 센터장에게 ‘너무 무리하지 말라, 몇사람이 노력한다고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천천히 가자’고 하니, 윤 센터장은 ‘누구라도 열심히 뚫고 가야지 바뀌지 않겠느냐’고 답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게 나한테는 그의 마지막 유언이 돼버렸다"고 밝혔다.

윤 센터장 사무실 한쪽 커튼을 젖히면 그가 2~3시간씩 쪽잠을 자던 낡은 1인용 침대가 놓여있다. 의료원 관계자는 "웬만한 간이침대보다도 못한 이 낡은 침대가 제일 큰 유품"이라고 했다.

윤 센터장은 2002년부터 국립중앙의료원 중앙응급의료센터에서 일해, 2012년부터 7년째 센터장 직을 맡았다. 동료들의 입을 통해 고인이 생전 국내 응급의료체계를 구축하고 이끌어 오면서 느꼈을 무거운 중압감과 고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 그는 의료원 측에 사의를 밝히고 2월 말 센터장직을 그만둘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왕준 이사장은 "새로운 제도가 도입되고 정책이 변화할 때마다 윤 센터장은 일선 현장의 의견을 대변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를 정책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애썼다"고 말했다.

이 이사장은 " 하지만 번번히 본래의 구상·정책안이 구부러지고 비틀려져 현실화됐고, 그럴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은 분노를 느끼고 불만을 쏟아 놓았지만 정작 윤 센터장은 다시 센터로 돌아가 사후 수습을 위한 업무 조정을 해야 했다"고 했다.

이 이사장은 "그는 본래 성품이 좀 수줍어하고 자기를 막 드러내 놓는 스타일이 아니라, 항상 조용히 일을 처리하고 겉으로 감정을 심하게 드러내지 않았다"며 "또 본인이 준공무원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 목소리를 대놓고 할 수도 없었다"고 말했다.

약 20년 전 전남대병원에서 윤 센터장과 인연을 맺은 김건남 전남대병원 응급구조사는 고인이 사망하기 불과 이틀 전 그를 만났다.

김건남 응급구조사는"응급의료 시스템을 위해서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헌신해왔다"며 " 응급구조사 업무 범위 관련 법·제도를 놓고 토론해왔고, 실제 2월 국회에서 열리는 공청회 패널로 참석해주기로 했었다"고 밝혔다. 그는 "평생을 응급의료 발전을 위해 일만 하시다가 이렇게 떠다나니 너무나 황망하다"며 "사랑하고 존경한다. 또 죄송하다. 부디 저 하늘나라에서는 편히 쉬기를 빈다"고 말했다.

윤한덕 센터장의 동료들은 "윤 센터장이 고민하던 문제들과 손 보려 했던 사안들이 남아있다"며 "단순히 헌신적인 의사공무원 한 사람의 순직에 대한 추념이 아닌 아직도 산적한 응급의료 정책에 대해 재조명 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고 입을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