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4조원의 노후 자금을 굴리는 국민연금이 1일 한진칼에 대한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면서 지분투자 기업에 대한 경영 참여의 물꼬를 텄다. 이날 국민연금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는 격론 끝에 한진칼에 대한 경영 참여를 결정했다. 다수를 이룬 시민단체 등 친여권 성향의 위원들이 적극적 주주권 행사를 밀어붙였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결정이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기금 운용 수익률이 2008년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를 기록할 전망일 정도로 운용 수익률이 엉망인데, '기업 손보기' 목적의 경영 참여 이슈에만 몰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1일 서울 중구 더플라자호텔에서 열린‘2019년 2차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회의를 마치고 나오고 있다. 이날 기금운용위는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에 대해 경영 참여형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6대5로 팽팽히 맞선 끝에 결론

이날 기금위 회의는 대한항공과 한진그룹의 지주사인 한진칼에 대한 주주권 행사를 최종 결정하는 자리였다. 국민연금은 대한항공의 2대 주주로 지분 11.56%를 보유하고 있고, 한진칼의 3대 주주(7.34%)다. 이날 회의엔 기금위원 20명 중 12명이 참석했고, 4시간이 넘는 격론을 벌였다. 결국 한진칼에 대해선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하되, 대한항공은 제외하기로 했다. 기금위에 앞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열렸던 수탁자책임전문위에선 두 회사 모두에 대해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는 의견이 많았지만, 이날 기금위가 한진칼에 대해 수탁자책임위의 결정을 뒤집은 것이다.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위원장을 제외한 11명 위원 의견이 성향에 따라 6대5로 팽팽히 맞섰다"고 말했다. 논란이 많았던 것이다. 시민·사회단체 등에 소속된 6명의 위원은 "경영진 일가의 일탈행위로 주주 가치가 훼손됐으니 주주권을 행사해 오너 리스크를 없애고 주주가치를 제고할 필요가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한 시민단체 측 위원은 "기금위 결정이 대통령을 비롯해 국민의 초관심사인데 뭐라도 하긴 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취지로 말했다고 한다. 국민연금의 적극적 경영 참여를 재촉했다는 것이다.

반면 재계 등에 속한 5명의 위원은 "아직 어떤 기업에 대해 어느 정도의 경영 참여를 할지 명확한 기준이 없는데 국민연금이 경영 참여를 선언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시장에도 큰 충격을 줄 것"이라고 맞섰다.

격론이 지속되자, 위원장인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중재에 나섰다. 경영 참여를 선택하되, 가장 강도가 약한 정관 변경을 하기로 결론을 모은 것이다. 한 참석 위원은 "결국 기금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국민연금이 경영 참여에 나서겠다는 것인데, 경영 참여 선언 이후 성과가 나쁠 때는 누가 책임져야 하느냐에 대해선 아무도 결론 내지 못했다"고 말했다.

◇"금고형 CEO 퇴출" 정관 변경 추진

국민연금이 한진칼에 대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결정했기 때문에 앞으로 5일 이내에 한진칼 주식의 보유 목적을 종전 '단순 투자'에서 '경영 참여'로 공시해야 한다. 국민연금은 오는 3월 열리는 한진칼 주주총회에서 "임원이 회사 또는 자회사 관련 배임·횡령의 죄로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되면 자동 해임된다"는 내용의 정관 변경을 제안하기로 했다. 다만 정관 변경을 하려면 주주총회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하지만 조양호 회장 일가 지분이 29%인 데다 우호 지분을 포함하면 40%에 육박한다. 이 때문에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제안한 정관 변경 안건이 통과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많다.

이상철 한국경영자총협회 본부장은 "정관 변경이 가장 약한 형태의 경영 참여라고는 하지만, 일반 기업 입장에서는 그것도 경영에 큰 부담일 수 있다"고 말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는 "국민연금의 경영 간섭이 심해지면 기업 경영이 위축되고 투자가 부진해져 오히려 기금 수익률에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