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우조선해양이 19년 만에 새 주인을 맞을 가능성이 커졌다. 현대중공업은 31일 산업은행과 인수합병에 대한 조건부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고 밝혔다. 조선업황이 회복 조짐을 보이는 지금이 민영화의 적기라는 판단이다. 대우조선이라는 이름이 사라질 수도 있는 의미 있는 날, 대우조선해양은 4년 만에 뽑은 대졸 신입사원들을 실무에 배치했다고 발표했다. 한국 조선업과 역사를 함께해온 대우조선해양의 흔적들을 짚어봤다.

◇ 대우그룹 효자 계열사…매각 시기 놓쳐 고난 시작

대우조선해양의 모태는 1973년 설립된 대한조선공사의 옥포조선소다. 대우그룹이 1978년 인수해 대우조선공업주식회사로 이름을 바꿨다. 대우조선은 시추선, 부유식 원유생산설비, 잠수함, 구축함 등을 건조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 선박수주량 1위를 기록한 1994년 대우중공업에 합병됐다.

그러나 외환위기로 2000년 대우그룹이 해체되면서 대우중공업은 대우조선공업,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청산법인 대우중공업으로 나뉘었다. 이 과정에서 산업은행은 대우조선해양을 자(子)회사로 떠안았다. 기나긴 산업은행과의 동거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대우조선해양이 건조한 마란가스사 LNG운반선 항해 모습.

대우조선해양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산은은 대우조선의 빼어난 실적 덕분에 자회사를 포함한 연결이익이 늘었고, 2000년 이후 배당 수익만으로 약 2500억원을 챙겼다. 산은은 2008년까지 매각을 미뤘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터지면서 매각 시기를 늦춘 것은 실책이었다. 포스코그룹, GS그룹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우선협상 대상자로 꼽혔던 한화그룹은 자금 조달에 실패했다. 금융위기에 시황이 크게 나빠졌고, 마땅한 인수자가 나오지 않았다.

방만 경영도 위기에 한몫했다. 2000년 이후 대우조선해양은 60명을 고문, 자문역, 상담역 등의 이름을 붙여 비상근 임원으로 위촉하고 이들에게 100억원이 넘는 급여를 지급했다. 자문 실적이 없는데도 억대에 가까운 연봉을 주고, 자녀 학자금 지원, 시내 중심가 사무실 제공, 연간 2000만원대의 법인카드까지 제공했다.

◇ 분식회계 사태와 옥포의 눈물

대우조선해양은 2015년 수조원대의 천문학적 적자를 기록하며 채권단 자율 협약 상태에 들어갔다. 산업은행 등 채권단은 4조원대 긴급자금 수혈을 결정하였으며, 회사는 FLC, 본사 사옥 매각 등을 골자로 한 자구계획안을 발표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2016년 7월 4일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대우조선 관련 문건을 하나 폭로했다. 이른바 ‘분식회계 사태’가 촉발되는 계기였다. 검찰이 확인한 분식회계 수법 가운데 상당수는 선박이나 해양플랜트 제조 등에 대한 계약이 중간에 해지됐을 때 이 부분을 당해연도 회계에 손실로 올리지 않았거나, 도리어 이득으로 둔갑시킨 경우였다. 이에 대우조선해양의 외부 감사기관인 안진회계법인은 신규영업 정지 1년이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대우조선해양 노동조합이 2016년 구조조정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대우조선해양은 2015년 최악의 상황에서 대표이사로 정성립 사장을 선임했다. 대우중공업에서 20년 이상 근무한 ‘뱃사람’인 정 사장은 혹독한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직장을 잃은 가장들이 속출하면서 ‘옥포의 눈물’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경영정상화를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회사는 2년 만인 2017년 7330억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연간 기준으로 영업이익 흑자를 낸 것은 2011년 이후 6년 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