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최대의 차량 공유 업체인 싱가포르 그랩이 "누적 운행 건수 30억건을 돌파했다"고 28일(현지 시각) 밝혔다. 사용자가 스마트폰에서 그랩 앱을 통해 자동차를 호출해 탑승한 뒤 목적지까지 이동한 건수가 30억번에 달했다는 것이다. 전 세계 차량 공유 기업 가운데 그랩보다 많은 운행 실적을 낸 곳은 중국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디디추싱(연간 약 100억건)과 세계 1위 업체 미국 우버(누적 100억건)뿐이다.

그랩·우버처럼 자가용을 이용해 돈을 받고 다른 사람을 목적지까지 태워주는 것은 한국에서는 불법(여객자동차 운수사업법 위반)이다. 출퇴근 때 차를 함께 타는 경우에 한해 돈을 받을 수 있다는 예외 조항에 따라 카카오모빌리티 등 몇몇 업체가 카풀 서비스를 시도하고 있을 뿐이다. 이마저도 택시업계의 강한 반발에 직면해 지난 15일에는 카카오모빌리티가 시범 서비스를 잠정 중단하기도 했다. 한국 기업들이 규제와 이해 집단 간 충돌 속에서 차량 공유 시장에 제대로 진입하지도 못하는 사이 해외 업체들은 빠르게 성장하면서 세계시장을 선점하고 있다.

7년 만에 기업 가치 110억달러… 글로벌 기업 투자 쏟아져

그랩이 2012년 6월 차량 호출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서비스 지역은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1곳, 등록 차량은 40여 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6년여 만에 서비스 지역은 동남아 8국 336도시, 등록 기사는 260만명으로 늘었다. 성장 속도도 빨라지고 있다. 그랩이 2017년 10월 운행 10억건을 돌파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5년 4개월이었다. 그러나 20억건 돌파까지는 9개월, 30억건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6억4000만 동남아 인구를 고객으로 끌어들이면서 매일 점점 더 많은 사람이 그랩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3월 태국 수도 방콕 도심을 달리는 택시에 차량 공유 서비스 기업 그랩의 로고가 그려져 있다. 말레이시아에서 소규모 업체로 시작한 그랩은 6년여 만에 동남아 최대의 차량 공유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랩의 빠른 성장을 본 글로벌 기업들이 앞다퉈 투자에 나서면서 기업 가치도 치솟고 있다. 그랩은 창업 이래 지금까지 흑자를 낸 적이 없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일본 소프트뱅크·도요타, 중국 디디추싱, 미국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68억달러(약 7조6000억원)를 쏟아부었다. 현대차·SK그룹 등 국내 대기업들도 그랩에 투자하고 있다. 그랩의 기업 가치는 110억달러(약 12조2900억원)로, 세계에 단 19곳뿐인 데카콘(기업 가치 100억달러 이상 스타트업) 중 하나다.

골드만삭스에 따르면 차량 공유 시장 규모는 2017년 360억달러(약 40조2100억원)에서 2030년 2850억달러(약 318조3500억원)로 8배 가까이 커질 전망이다. 이 시장은 자율주행 자동차 기술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적용될 분야로도 꼽힌다.

해외 업체들 '데이터 부자' 되는 동안 한국은 제자리걸음

해외 차량 호출 서비스 기업과 한국 기업 간 격차는 데이터 축적 속도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랩은 고객을 30억번 이상 태워주면서 210억6500만㎞ 운행 데이터를 얻었다. 지구를 52만번 이상 돌 수 있는 거리다. 그랩은 이런 데이터를 분석해 소비 패턴을 파악한 뒤 배달·결제·금융 등 새로운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디디추싱은 지난해에만 그랩의 배가 넘는 488억㎞ 운행 데이터를 얻었다. 반면 국내 택시 호출 업체인 카카오모빌리티가 4년 가까이 서비스를 운영하면서 얻은 기록은 45억9600만㎞ 분량이다. 그랩의 4분의 1에 불과하다.

국내 기업들은 해외 진출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다. 이병태 한국과학기술원(KAIST)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는 "세계에서 차량 공유 서비스가 처음 시작된 시점과 비교하면 한국은 10년 늦은 셈"이라며 "한국 기업들은 국제 경쟁은커녕 국내시장 지키기도 버거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