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분기부터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급속도로 얼어붙고 실적 역시 곤두박질치자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 등 주요 반도체 기업들이 공급량 줄이기에 나서고 있다. 예상보다 가격 하락세가 가파르자, 설비 투자를 줄이거나 유보하겠다는 기업들이 속속 등장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2000년대 초·중반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벌어졌던 치킨게임(극단적인 가격 경쟁)이 다시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치킨게임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불황이 장기화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또 수십여 개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치열한 점유율 경쟁을 벌였던 2000년대와 달리, 지금은 삼성전자·SK하이닉스·마이크론의 3강 구도가 확고해 굳이 출혈 경쟁의 실익(實益)도 크지 않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반도체 업황이 상반기에 저점을 찍고 하반기부터는 다시 개선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라며 "기업들도 무리한 가격 경쟁보다는 공급량을 조절하면서 하반기에 돌아올 호황기를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

세계 주요 메모리 기업들, 나란히 투자·공급 줄이기 나서

SK하이닉스는 지난 24일 실적 발표를 통해 올 1분기 D램과 낸드플래시 출하량이 작년 4분기보다 10%, 15%씩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작년 4분기까지만 하더라도 D램 판매량만 2% 감소했고 낸드플래시는 10%나 증가했었다. SK하이닉스는 올해 신규 장비 투자 규모도 작년보다 40% 줄일 계획이다. 또 작년 완공한 청주의 M15, 중국 우시의 신규 공장 가동 시점 역시 예상보다 늦어질 것이라고 밝혔다. 본격적인 공급량 관리에 들어갔다는 의미다.

세계 3·4위 D램 기업인 미국 마이크론과 대만 난야도 투자를 줄이고 공급 관리에 돌입했다. 지난달 미국 마이크론은 올해 투자 규모를 당초 105억달러(약 11조7400억원)에서 90억달러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대만 난야도 지난 15일 실적 발표에서 올해 장비 투자 규모를 작년(204억 대만달러)의 절반 수준인 100억 대만달러(약 3635억원)로 줄이겠다고 밝혔다.

세계 1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인 삼성전자의 전략도 비슷하다. 반도체 업계와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이미 작년 4분기부터 D램과 낸드플래시 출하량을 줄여나가면서 공급량 조절에 나섰다고 본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4분기 삼성의 매출과 영업이익 감소 폭이 SK하이닉스보다 더 크다는 것은 삼성이 선제적으로 공급량을 조절했다는 의미"라고 말했다.

가격 하락세 예상보다 심해

기업들이 공급량 감축에 나서는 이유는 가격 하락세가 예상보다 가파르기 때문이다. 대만의 반도체 시장 조사 업체인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D램 가격은 작년 4분기에만 10% 이상 하락했고, 올 1분기에도 20% 더 떨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특정 기업이 물량을 늘려 가격 경쟁을 시작하면 업황이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기업들은 반도체 하강 국면이 올 상반기 중에 끝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작년 하반기부터 주문량을 급격히 줄인 서버(대용량 컴퓨터) 업체들이 올 하반기부터는 서버 개·보수를 위한 반도체 주문을 확대하고 자동차와 사물인터넷(IoT) 기기 수요도 커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미국 낸드플래시 업체인 웨스턴디지털의 스티븐 밀리건 최고경영자(CEO)는 25일 실적 발표에서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장기적인 수요는 견고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 김석 상무는 "현재 시장은 상저하고(上低下高) 상황"이라며 "하반기로 가면서 업황이 개선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맞춰서 공급량을 관리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