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증시의 8%를 차지하는 큰손인 국민연금이 한진그룹 주요 기업에 대해 적극적인 주주권 행사를 검토하기로 해 재계가 긴장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기금 운용의 독립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연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를 내세워 과도한 경영 개입에 나선다면 기업의 경영권 위협은 물론, 미래 경쟁력 약화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에 대해 조명현 한국기업지배구조연구원장은 "국내 기업들이 아직까지 주주들의 권리 행사에 익숙하지 않아서 불편해하는 것"이라며 "앞으로 기업들은 귀에 거슬리는 소리도 배척하지 말고 기관투자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기업 경쟁력을 높여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사면초가 한진그룹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한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의 칼을 휘두르는 첫 대상은 재계 14위인 한진그룹이다. 국민연금은 오는 16일 국민연금 최고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기금운용위)를 열고, 대한항공과 한진칼 주총에서 국민연금이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해야 할지를 논의한다. 국민연금은 한진그룹 지주사인 한진칼의 3대 주주(7.34%)이며, 대한항공 지분은 12.45%를 보유해 2대 주주다.

국민연금은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 대주주 일가가 각종 배임, 사익 편취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아 주주 가치를 훼손한 것에 대해 책임을 물을지 검토한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법으로는 조 회장 일가의 사내이사 연임 반대, 신규 이사진 선임 등이 거론된다. 갑질 논란 등으로 기업 가치를 심하게 떨어뜨린 회사 임원이 있다면, 국민연금은 기금운용위 의결 등을 거쳐 해임의결권을 행사할 수도 있다.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한진 대주주 일가의 일탈 행위로 주주 가치가 떨어졌는데 해당 기업들이 어떤 조치를 해왔는지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서 자세히 보고받고 제반 상황을 들여다볼 것"이라며 "이런 논의를 토대로 이달 말쯤 다시 기금운용위원회를 열고 주주권 행사 여부를 결정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강성부 펀드 행보도 관심

국민연금이 주주권 행사에 나서면서 2대 주주인 사모펀드와의 연계 가능성에도 관심이 쏠리고 있다. 토종 행동주의 펀드인 KCGI는 한진그룹에 대한 공세 수위를 높여가고 있다. 강성부 대표가 이끄는 KCGI는 한진그룹 지배 구조의 정점에 있는 한진칼의 2대 주주다. 이달 초에는 한진 지분도 8.03% 취득해 2대 주주로 올라섰다. 한진은 한진택배나 렌터카 등을 운영하는 물류 회사다. 재계 관계자는 "한진칼 지분을 취득한 KCGI는 상근감사를 교체하려고 했지만 한진 측의 방어로 불발됐다"면서 "한진은 한진그룹의 주력 계열사는 아니지만, 상장사 중 가장 적은 금액을 쓰면서 대주주를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는 대상이라고 판단해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KCGI가 한진의 2대 주주로 올라서기 위해 쓴 자금은 505억원이다. 이에 대해 강성부 KCGI 대표는 "기업 경영권을 빼앗기 위해 지분을 취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 구조를 개선해서 주주로서 이익을 내려는 것"이라며 "기존 경영진을 상대로 적대적인 인수·합병(M&A)을 하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재계 관계자는 "행동주의 펀드의 지분 취득 목적은 오로지 수익 창출에만 있다"면서 "긴 호흡으로 투자해야 하는 업종 특성을 잘 알지 못한 채,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면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 활동은 어려워질 수 있다"고 반박했다.

재계 "경영권 위협은 물론 경쟁력 약화 우려"

한진그룹은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움직임 등에 대해 일절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다만 재계에선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경영계가 요구한 국민연금의 독립성 강화 방안은 뒷전으로 미룬 채 주주권 행사에 나설 경우, 국내 기업의 경영권 위협은 물론 경쟁력 약화도 불 보듯 뻔하다"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구조를 개편해 정부나 정치권의 영향으로부터 독립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경련 관계자는 "국민연금이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상황이 아닌 상황을 감안할 때 주주권 행사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며 "대기업 경영권에 영향을 미치는 부분에 대해서는 국민 경제 전체적 관점에서 검토돼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