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참여하는 구간설정서 최대 인상폭 결정
기업지불능력·경제성장률·고용·사회보장급여 고려

정부가 1988년 최저임금 제도 시행 이후 31년 만에 처음으로 최저임금 결정 과정을 바꾸면서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불확실성 제거’다. 노·사·정이 각각 추천한 전문가(공익위원) 총 9명으로 구성된 ‘구간설정위원회’가 먼저 최대 인상폭을 정한 뒤 별도 ‘결정위원회’가 최종 금액을 정하도록 한 것이다. 또 생계비, 임금 수준, 사회보장급여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률, 기업의 지불능력, 고용 수준, 노동생산성 등 여러 지표를 기준으로 다음 해 인상폭을 정하도록 했다. 이렇게 되면 2018년도 최저임금이 전년 대비 16.4% 오르면서 청와대 예상을 뛰어넘었던 일이 재연될 가능성은 낮아진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은 7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 논의 초안’을 발표했다. 정부가 마련한 최저임금 결정 방식의 핵심은 ‘구간설정위원회’를 9명의 공익위원으로 구성해 인상폭을 결정한 뒤, 현 최저임금위원회와 비슷하게 노·사·정 동수로 구성된 ‘결정위원회’에서 최종적인 금액과 인상률을 확정하는 것이다. 구간설정위원회에서 최대 및 최소 인상률을 정한 뒤, 그 범위에서 인상률을 정하는 이원 결정 방식이다. 최저임금 결정 방식이 바뀌는 것은 1988년 이후 처음이다.

◇임단협식 결정 방식·정부 책임론서 벗어날 목적

정부가 최저임금 결정 방식을 바꾸기로 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결정 체계를 합리화하겠다는 것이다. 이재갑 장관은 "근로자위원 9명, 사용자위원 9명, (정부가 선임하는) 공익위원 9명으로 구성된 현 최저임금위원회는 노·사의 최초 제시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시작돼 처음부터 노사 교섭 과정 식의 극심한 갈등이 빚어졌다"며 "결정체계를 보다 합리적이고 객관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왔다"고 개편에 나선 이유를 설명했다. 실제 2016년 최저임금의 경우 사용자위원은 동결, 근로자위원은 79.2% 인상을 요구해 큰 격차를 보였다.

여기에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인 2017년 6월 최저임금위원회에서 2018년도 최저임금을 전년 대비 16.4% 오른 시간당 7350원으로 결정한 것과 같은 일을 다시 겪지 않겠다는 판단도 깔려있다. 청와대와 정부 고위 관계자는 당시 상황에 대해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의 인상폭이었다"며 "당시 경제팀이 최저임금 급등의 부작용을 막기 위해 일자리안정자금 등 보완 대책을 만들기 위해 적잖이 고생했다"고 말한다.

당시 최저임금위원회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최저임금을 올린 것은, 노·사·정의 역학 관계가 노동계 쪽으로 일방적으로 쏠렸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위원회는 각각 9명의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이 기업체 임금단체협상을 벌이듯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다가, 막판에 공익위원 중재로 서로가 적당하다고 판단하는 수준으로 타협안을 만든다. 그런데 2017년의 경우 ‘최저임금 1만원’에 경도됐던 당시 문재인 정부 기류에 공익위원들이 제 목소리를 못내고 노동계에 끌려갔다는 게 정설이다. 정부의 개편안대로 전문가 위원회가 최대 인상폭을 결정하게 되면 최저임금이 큰 폭으로 튀듯이 오르는 일을 막을 수 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7일 서울 정부서울청사에서 최저임금 결정 제도 개편안을 발표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노동계는 이번 개편안에 대해 "최저임금 1만원 공약을 폐기한 것"이라며 격렬히 반발한다. "전문가가 인상 구간을 미리 정하는 것은 노사 자율성을 심각하게 침해하는 것"(한국노총)이라는 입장이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은 9일 최저임금위 근로자위원 워크숍을 열고 대응방안을 논의하기로 했다.

두 번째 이유는 정부가 현재 캐스팅보트를 쥔 공익위원 9명을 모두 선임하면서 사실상의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비판에서 벗어나겠다는 것이다. 이 장관은 "이번 개편안은 그 동안 정부가 최저임금에 관여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부는 관여하지 않고 객관적인 전문가들이 구간을 설정하고 노사 공익위원이 모여 결정하도록 하겠다는 게 요지"라는 게 이 장관의 설명이다.

2018년 5월 선임된 제11대 최저임금위원회 공익위원들은 진보 일색이란 비판을 받아왔다. 위원장인 류장수 부경대 교수는 보수와 진보 양 쪽에서 일을 해왔지만, 친문(親文) 성향이 강하다. 2012년 대선에서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후보의 일자리혁명위원회에 참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나머지 공익위원 7명도 진보색이 분명하단 평가다. 노무현 정부 당시 각종 정부 위원을 맡거나 2017년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일한 정치권 출신에다 진보 성향 학자들로 구성됐다.

◇양대 노총·경총 위원 비중 줄여 힘 뺀다

정부는 구간설정위원회가 인상폭을 결정할 때 경제 상황, 노동 시장 여건, 기업의 지불 능력 등 객관적 지표를 근거로 삼도록 했다. 지금은 최저임금 결정 시 근로자 생계비, 유사 근로자의 임금, 노동생산성 및 소득분배율을 참고한다. 개편안에서는 근로자 생계비, 소득분배율, 임금수준, 사회보장급여 현황 및 노동생산성, 고용수준, 기업 지불능력, 경제성장률을 포함한 경제상황 등 객관적 경제 지표를 결정기준으로 삼도록 명문화했다.

또 정부는 구간설정위원회를 상시적으로 운영, 최저임금이 미치는 영향에 대한 모니터링과 분석을 실시하도록 할 계획이다. 고용부는 "현장의 목소리가 충분히 반영된 최저임금 심의가 이뤄지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구간설정위원회 공익위원 9명 선임 방법을 두 가지로 제시했다. 1안은 노·사·정이 각각 5명씩 추천한 뒤, 노동계와 경영계가 추천한 위원 중 각 3명씩만 제외해 위원회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해서 정부 5명, 노동계 2명, 경영계 2명씩 각각 추천한 공익위원들로 위원회가 짜여진다. 2안은 노·사·정이 각각 3명씩 공익위원을 추천하는 방식이다. 구간설정범위에 대한 제한은 없다. 재적위원 과반수 출석과 출석위원 과반수 찬성으로 결정된다.

현 최저임금위원회는 결정위원회로 축소된다. 근로자위원, 사용자위원, 공익위원이 동수로 위원회를 구성하는 것은 같다. 하지만 인원이 줄고, 공익위원 추천 과정에 국회 몫이 만들어진다. 정부는 인원에 대해서 각각 7명씩 총 21명 또는 각각 5명씩 총 15명을 현 최저임금위원회 방식으로 위원을 뽑는 안을 제시했다. 또 5~7명의 공익위원 추천의 경우 국회가 임명권을 일부 갖는 1안과 노사정이 각각 같은 수를 추천한 뒤, 노사 추천 전문가 중 일부를 배제하는 2안을 제시했다. 공익위원 7명의 경우 1안은 국회가 3명, 정부가 4명을 추천한다. 2안은 노·사·정이 각각 5명을 추천하고 노동계와 경영계 위원은 그 중 1명만을 추린다.

한편 정부는 결정위원회 내에 청년, 여성, 비정규직 근로자와 중소, 중견기업, 소상공인 대표를 반드시 포함하도록 법률에 명문화할 방침이다.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이 줄어드는 만큼 이 같은 조치는 민주노총, 한국노총, 경총 등 노동계와 경영계 단체의 위원 몫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결국 최저임금위원회 내에서 양대 노총과 경총 등 경영계의 몫은 줄어들게 된다. 또 노동계와 경영계가 최저임금 결정 과정에서 갖는 영향력도 축소된다. 지금까지는 양대 노총과 경총, 중기중앙회가 거의 대부분의 근로자위원과 사용자위원을 추천해왔다. 또 노사 양쪽의 협상안을 정해왔다.

이 장관은 "1월 말까지 토론회 등 국민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쳐 오는 2월 임시국회에 최저임금 결정 방식 개편 방안을 담은 최저임금법 개정안을 상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20년도 최저임금부터 새 방식을 적용하겠다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앞서 이날 오전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7월 이전에는 최저임금법 개정 입법을 마무리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