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부터 나흘간 열린 삼성전자 글로벌전략회의에서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스파이용 '방해공작 현장 지침'이 화제에 올랐다. 주요 임원과 해외법인장들이 모여 내년도 경영 전략을 논의하는 중요 회의에서 지난 19일 소비자가전 사업을 담당하는 김현석〈사진〉 사장이 이 내용을 동영상으로 만들어 상영한 것이다.

동영상에는 CIA의 전신인 미 전략사무국(OSS)이 1944년 발간한 '손쉬운 방해공작 현장 매뉴얼'의 내용이 담겼다. 스파이가 적국(敵國)의 조직에 침투해 생산성을 떨어뜨리는 데 쓰인 지침으로, 기업 현장에서도 반면교사(反面敎師)처럼 활용할 수 있다는 취지에서다. 즉 삼성전자 내에서도 이처럼 회사를 망가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지 않은지 점검해보라는 뜻이다.

스파이 지침은 상대 조직의 경쟁력을 훼손하는 방법이 열거돼 있다. '회사가 위급하고 신속한 결정이 필요할 때 자주 회의를 열자고 제안한다', '막상 회의가 열리면 개인적 무용담처럼 주제와 관련없는 얘기를 한다','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단어의 정확성을 따지고 실패하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말로 불안감을 고조시킨다' 등이 주요 내용이다.

또 '주요 보고서는 일부 내용을 누락해 작성하고 상사가 업무를 시키면 못 알아들은 척하고, 늘 사죄하는 태도를 보이라', '신입 사원들에게 잘못된 방향으로 업무를 지시하고, 탁월한 성과를 내는 직원에게는 회사가 당신을 차별하고 있다고 부추겨 근무 의욕을 저하시키라'는 지침도 있다.

삼성 전략회의에 참가한 임원들 사이에서는 '스파이의 모습이 무능한 직장인의 모습과 똑 닮았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스파이의 행동이 조직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일과 매우 닮아있는 만큼 이를 바탕으로 임직원들이 스스로를 되돌아보며 경각심을 일깨우자는 취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