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운은 수출이 주도하는 한국 경제의 기간산업이다. 그러나 2016년 한진해운 파산으로 한국 해운은 무너졌고, 유럽 노선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북미 노선과 함께 양대 원양 노선으로 꼽히는 유럽 노선은 글로벌 선사와 포워더, 화주들이 복잡하게 얽혀 치열하게 경쟁하는 핵심 노선이다. 유럽 노선 복구 없이 한국 해운의 경쟁력 회복은 어렵다. 유럽 노선 최전선인 네덜란드 로테르담, 독일 함부르크에서 한국 해운이 나아가야 할 길을 살펴본다.

"영국 지나면 황천(荒天) 대비해야죠."

12월 2일 오후 8시(현지시간) 현대상선의 46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 현대수프림호는 네덜란드 로테르담항을 출발해 독일 함부르크항으로 향해 가고 있었다. 염철수 현대수프림호 선장은 독일과 영국을 거쳐 돌아가는 길에 날씨가 다시 안 좋아질 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황천은 비바람이 심한 날씨를 말한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북해 앞바다를 항해하는 현대수프림호는 로테르담항에서 출항할 때부터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유럽은 동계 강풍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강한 바람이 선체에 부딪혔다. 날이 화창하게 맑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바다 날씨는 육지에 있을 때보다 훨씬 변덕스러웠다. 해가 떠 있는 시간에도 창밖은 어두컴컴했다.

하루 전날 승선한 현대수프림호 내부는 꽁꽁 묶여 있었다. 선박을 지휘하는 브릿지(선교‧船橋)에서 잠시 쉴 수 있도록 마련된 소파마저 밧줄로 고정돼 있었다. 식당을 제외한 휴게실 등 공용 공간은 사람의 손길이 닿은 지 오래돼 보였다. 부산부터 유럽까지 정신없이 달려 온 현대수프림호의 고된 여정이 그대로 드러났다.

네덜란드 로테르담항 RWG 터미널에 현대수프림호가 접안해 있다.

사실 현대수프림호는 초대형 선박 격전지인 유럽 노선에 투입하기 적절한 배는 아니다. 남미에 위치한 파나마 운하에 최적화된 파나막스(panamax)형 선박으로 2008년 건조된 중고선이기 때문이다. 배 크기도 작다. 겨울철 유럽 항해가 유독 힘든 이유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2020년 2만3000TEU급 선박 투입 전 화주를 미리 확보하겠다는 전략적 판단으로 4600TEU 10척을 임시 투입해 독자 노선을 꾸렸다. 현대수프림호는 회사 운명이 걸린 2만3000TEU가 투입되기 전까지 바닷길을 갈고 닦는 임무를 부여 받고 운항 중이다. 미리 항로를 다니며 기상‧항만‧운항 여건 등을 살피고 있다.

염 선장은 "회사가 직접 보유한 사선(私船)이 다니며 조직이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놔야 초대형선이 들어왔을 때 삐걱거림 없이 운영 가능하다"며 "처음 초대형 선박을 운항하는데 항구마저 낯설면 안정적이지 않기 때문에 미리 항로를 익혀놔야 한다"고 했다.

현대수프림호가 투입된 AEX 노선

◇ 항로 한 바퀴에 77일…날씨‧항구 상황 등 각종 변수에도 시간 지켜야

현대수프림호는 10월 28일 부산에서 출발해 34일 만에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도착했다. 이 배는 독일 함부르크, 영국 사우샘프턴을 거쳐 다시 수에즈운하를 통과해 내년 1월 12일 부산에 도착할 예정이다. 77일이 걸리는 여정이다. 똑같은 항로를 5번 돌면 1년이 지난다. 이미 2020년 2월 1일까지 세부 일정이 나와 있다.

현대수프림호는 이번 항차에서 첫 기항지인 중국 상하이항부터 발목이 잡혔다. 상하이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물동량을 처리하는 주요 항만이지만, 짙은 안개가 자주 끼는 등 날씨가 좋지 않고 많은 배가 몰려 스케줄 지연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게다가 중국은 날씨 때문에 일정이 꼬이더라도 자국 선박이 우선인 곳이다.

현대수프림호는 속도를 내서 상하이항에 빨리 도착하더라도 기름만 소모할 뿐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천천히 운항했다. 여기서 정해진 일정보다 이틀이 지연됐다. 해운업에서 시간은 금이다. 항구에 제 날짜에 도착해야 신뢰 지표인 정시성을 지킬 수 있다. 또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연료비를 아끼는 정속 주행도 가능하다.

결국 현대수프림호는 닝보, 카오슝, 얀티엔, 싱가포르를 거쳐 수에즈운하까지 가는 동안 예상보다 많은 연료를 소모했다. 수에즈운하를 겨우 지나 지중해를 거쳐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와 스페인‧포르투갈을 지나자 이번에는 저기압이 길을 가로 막고 나타났다.

로테르담에서는 선석(접안장소)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빨리 와달라고 했다. 선석 일정이 맞지 않으면 다른 배가 작업을 끝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만큼 시간은 더 지연된다. 현대수프림호는 본사, 대리점 등과 계속 연락을 주고받으며 항해 일정을 조율했다. 결국 안전하게 저기압을 보내고 전체 일정을 조금씩 미뤘다.

독일 엘베강을 따라 함부르크항으로 항해하고 있는 현대수프림호

◇ 운항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기름’

염 선장은 운항하면서 가장 신경 쓰는 요소가 ‘기름’이라고 했다. 그는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기름 절약이다. 어떻게 하면 기름을 아끼면서 다닐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본사와도 소통한다"고 했다. 특히 국제유가가 80달러를 넘겼던 올해 3분기는 기름과의 전쟁이었다. 현대상선은 작년보다 더 많은 물량을 처리하고도 기름 값 상승으로 적자가 늘었다.

현대수프림호는 대표적인 연료 공급지인 싱가포르와 로테르담을 모두 경유하는데, 기름 값이 좀 더 싼 로테르담에서 연료 공급을 받는다. 이번 항차에서도 로테르담에서 벙커C유 3000t을 공급 받았다. 12월 초 기준으로 로테르담 벙커C유 가격은 t당 368달러로 110만4000달러(12억4000만원)를 쓴 셈이다. 같은 양을 싱가포르(t당 420달러)에서 공급 받으면 126만달러(14억2000만원)로 2억원 가량 더 비싸다. 현대수프림호는 이번에 채운 기름으로 부산을 갔다가 다시 로테르담에 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선박 핵심인 기관실에서도 엔진 출력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다. 벙커C유가 완전연소 돼야 원하는 출력을 낼 수 있기 때문에 항구에 정박할 때마다 사전 정비를 진행했다. 이영호 현대수프림호 기관장은 "현장에서는 마른 수건 쥐어짜듯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로테르담에서 출항해 함부르크까지 가는 약 30시간 동안 선장, 기관장을 비롯한 항해사, 기관사들은 손때와 기름때가 잔뜩 묻은 작업복을 입고 분주하게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