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 가격이 올라 거액의 시세 차익을 올린 A씨는 수억원대 양도소득세 납부 고지서를 받아들자 세금을 내는 게 왠지 억울해졌다. A씨는 세금을 내지 않기로 마음먹고 행동에 옮겼다. 양도대금 26억원 중 대출금 9억원을 뺀 17억원을 일단 수표로 받은 뒤 88차례 은행을 방문해 조금씩 현금으로 바꿨다. 행여 의심을 살까 봐 은행도 한 곳만 가지 않고 거주지 주변의 지점 44곳을 일일이 돌아다녔다. 이렇게 바꾼 현금은 사위 명의의 대여 금고에 넣을 만큼 마무리도 용의주도했다.

하지만 A씨에게서 체납 세금을 받아내려는 국세청 직원들도 A씨 못지않게 집요했다. A씨 집을 수색해 허탕을 친 국세청 직원들은 장기간 주변 탐문을 벌인 끝에 대여 금고의 존재를 알아냈다. 영장을 발부받아 연 대여 금고에서 나온 것은 5만원권 3100장(1억6000만원)과 미화 100달러 2046장(약 2억원). 결국 덜미를 잡힌 A씨는 나머지 체납 세금 4억7000만원을 자진 납부하며 백기 투항했다.

국세청이 한 체납자에 대한 가택수사에서 발견한 비밀 수납장. 현금 7000만원과 골드바 3㎏(1억6000만원 상당), 명품 시계 등이 은닉돼 있었다.

국세청은 A씨와 같은 악의적인 고액 체납자의 재산을 추적해 올해 10월까지 1조7015억원을 징수하고, 해외 재산 도피를 막기 위해 1만3233명에 대해 출국 금지를 요청했다고 5일 밝혔다. 고액 체납으로 출국 금지된 사람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44.5% 급증했다.

국세청 산하 6개 지방청에는 고액 상습 체납자를 전담하는 18개팀 직원 133명이 있다. A씨 같은 기발한 수법의 탈세범들과 매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12억원짜리 고급 오피스텔을 매도한 B씨는 탈세를 위해 배우자와 위장 이혼까지 했다. B씨는 위장 이혼한 배우자 명의로 부동산을 구입하고 나머지 매도 대금은 현금으로 바꿔 집 안에 숨겼다. B씨 집을 수색한 국세청 직원들은 거실 비밀 수납장에서 현금 7000만원, 골드바 3㎏(1억6000만원 상당) 등을 발견해 압수했다. 함께 발견된 명품 시계까지 매각해 끝내 세금 2억3000만원을 받아냈다.

국세청 조사관이 재산 은닉 혐의를 받는 한 체납자의 옷장을 수색하고 있다. 옷장 속 양복 주머니에서는 100만원짜리 수표 180장(1억8000만원)이 발견됐다.

소득세 수십억원을 체납한 C씨는 본인 명의로 된 재산 하나 없이도 호의호식하며 잘살고 있었다. 국세청 직원들은 잠복과 탐문 끝에 C씨가 다른 사람 명의로 된 서울 강남 아파트에 살며 타인 명의 대여 금고에 재산을 숨긴 사실을 알아내고 실거주지와 대여 금고를 동시에 수색했다. 그 결과 대여 금고에서 1억원짜리 수표 6장과 1억원 상당의 명품 시계 3점이, 실거주지에서는 100만원 수표 5장이 발견됐다.

국세청은 이 같은 노력을 통해서도 결국 세금을 받아내지 못한 고액·상습 체납자 7157명의 명단을 이날 국세청 웹사이트에 공개했다. 개인 5021명, 법인 2136곳이며 총체납액은 5조2440억원이다.

가장 많은 세금을 체납한 개인은 정평룡(전 정주산업통상 대표자)씨로 부가가치세 250억원을 내지 않았다. 법인의 경우 화성금속이 299억원의 부가가치세를 미납했다. 이 밖에 전두환 전 대통령이 양도세 등 31억원을 내지 않았고, 수임료 100억원을 받고 '정윤호 게이트'에 연루됐던 최유정 전 변호사가 종합소득세 69억원을 미납해 명단에 올랐다. '재벌가 미술상(商)'으로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서미갤러리도 세금 20억원을 체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