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産) 자율주행차 스누버가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국내 기업 최초로 자율주행 택배 시범 서비스를 시작했다. 한국형으로 개발된 자율주행차가 미국에서 먼저 서비스에 나선 것이다. 미국에서는 현재 60여 개 기업이 치열한 자율주행차 상용화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구글은 이달부터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유료 자율주행 택시 서비스를 시작하고, GM도 내년부터 미국 주요 대도시에서 자율주행 택시 서비스를 상용화할 계획이다.

반면 우리나라는 자율주행차 경쟁에서 크게 뒤처져 있다. 기술 경쟁력이 떨어질 뿐 아니라 높은 규제 장벽으로 인해 자율주행차라는 미래 신산업이 발붙일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김창경 한양대 과학기술정책학과 교수는 "미국 기업들이 차량공유, 자율주행차, 숙박공유 등 새로운 서비스를 선점한 것은 규제의 영향 없이 자유롭게 사업을 추진하면서 시장의 평가를 받는 시스템 덕분"이라며 "하지만 한국은 기존 법을 따르지 않으면 모두 금지하는 구시대적인 규제에 갇혀 있다"고 말했다.

"차량공유조차 불법인데 자율주행차가 되겠나"

자율차 업계 관계자들은 한국에서는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더라도 이를 활용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고 지적한다. 라이다(물체 인식 센서)와 레이더, 카메라 등을 장착하고 각종 첨단 소프트웨어로 작동하는 자율주행차는 대당 1억원 이상의 제작 비용이 든다. 개인 구매보다는 차량공유업체가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실제로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 회장은 우버·그랩·디디추싱·올라캡스 등 전 세계 차량공유 업체들에 대거 투자를 하면서 "머지않아 다가올 자율주행차 시대를 대비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자율주행차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에서 개발한 자율주행 택배용 차량이 팰로앨토 시내를 주행하고 있다. 이 스타트업은 한국에서 기술을 개발했지만 실제 시험 서비스는 미국에서 처음 선보였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차량공유 서비스가 불법이다. 여객운수사업법과 도로교통법은 운전자의 범위나 자격 요건을 택시·버스를 비롯한 기존 운수 사업자에 맞춰 규정하고 있다. 상업 서비스는 운송면허를 가진 사람만이 할 수 있다는 식이다. 세계 최대 차량공유업체 우버나 한국 카풀업체 풀러스, 공유버스 콜버스 등도 이런 규제에 막혔다. 특정 시간 이외에는 상업적 카풀이 불법이라거나 정해진 노선 이외의 버스 운행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규제가 적용됐다. 자율주행 택시·버스도 운송면허 자격 요건에 맞지 않는 만큼 상용화가 불가능하다. 자율주행차 스누버로 미국에서 택배 서비스를 시작한 토르드라이브의 계동경 대표는 "전 세계 누구나 사용하는 우버나 리프트조차 한국에서 서비스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율주행차 서비스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라면서 "자율주행차가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논란에 휘말릴까봐 아예 검토조차 하지 않는 기업도 있었다"고 말했다.

고질적인 규제 장벽 해결 시급

미국은 자율주행차가 실제 도로를 달릴 수 있는 지원 시스템도 적극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애리조나를 비롯한 미국 주(州) 정부들은 신산업 규제 면제 제도를 통해 자율주행차가 3년 이상 기존 자동차 안전 기준을 적용받지 않고 운행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보험사들은 대부분 시스템 결함에 따른 배상을 보장하는 자율주행차 전용 보험 상품을 출시한 상태이다. 반면 한국에서는 아직 제대로 된 자율주행차 전용 보험 상품이 없다. 현대해상·삼성화재 등이 시험 차량에 한해 출시한 자율주행차 보험은 사고가 발생하면 자율차가 무조건 100% 상대방에 배상해줘야 한다. 자동차 업계의 한 관계자는 "미국과 달리 한국의 보험업계나 정부 관계자들은 자율주행차가 곧 현실이 된다는 인식 자체가 없다"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수많은 위험을 감수하면서 굳이 자율차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가 한국의 고질병인 규제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평가한다. 미국이나 중국 등 4차 산업혁명에서 앞서 나가는 국가들은 불법으로 규정한 것 이외에는 일단 허용하는 '네거티브' 규제 체계를 갖고 있다. 새로운 사업이나 서비스 도입이 쉽다는 것이다. 반면 한국은 법에서 허용한 것 이외에는 모두 불법으로 간주하는 '포지티브' 규제 시스템을 고수하고 있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정책위원은 "정부가 계속 규제개혁을 외치고 있지만 문제가 제기된 것만 해결하는 식으로 움직이는 것이 사실"이라며 "네거티브 방식으로 규제 체제를 완전히 바꿔서 국내 기업들이 새로운 사업에 도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