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산(産) 자율주행차 '스누버'가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혁신의 상징인 미국 실리콘밸리 한복판에서 상품을 배달하기 시작했다. 5000개 매장을 가진 대형 건자재 체인 기업 에이스 하드웨어와 함께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자율주행 택배 시범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자율주행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를 창업한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서승우(오른쪽) 교수와 제자 계동경 대표. 이들 뒤로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앨토 시내를 주행하는 토르드라이브의 자율주행 택배용 차량이 있다.

스누버는 자율주행차 분야의 국내 최고 권위자로 꼽히는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와 연구실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계동경씨를 비롯한 제자들이 2015년 설립한 스타트업(초기 벤처기업) 토르드라이브가 제작했다. 35명의 직원 중에 20명가량이 서 교수 제자이다. 토르드라이브의 당초 목표는 한국 도로 사정에 최적화된 자율주행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서 교수는 "연구실에서 자율주행차를 개발하는 데 만족하지 말고, 실제 사람들이 타고 달리는 차를 만들자고 제자들과 뜻을 모았다"고 했다. 스누버는 여의도를 비롯해 복잡한 서울 도심을 3년간 6만㎞ 이상 무사고로 주행하면서 기술력도 입증했다.

하지만 높은 규제 장벽이 이들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한국에서 우선 상용화하겠다는 계획은 미뤄야 했다. 서 교수는 "카풀이나 우버 같은 신규 서비스가 규제와 기득권에 부딪혀 좌절되는 것을 본 해외 투자자들이 투자를 꺼렸다"고 했다. 토르드라이브는 결국 지난해 미국으로 거점을 옮기면서야 투자와 상용화에 대한 활로를 찾았다. 토르드라이브는 한국에서도 대형 유통 기업들과 손잡고 내년 6월부터 자율주행 택배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서 교수는 그러나 "아직까지는 긍정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지만 상업적인 목적의 자율주행 서비스 허가는 해결해야 할 규제가 많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현지 시각)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의 건자재 유통 체인 에이스 하드웨어 매장.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포드 밴을 개조한 자율주행 스타트업 토르드라이브의 차량이 주차장을 출발했다. 20분간 정해진 경로에 따라 팰로앨토 시내 곳곳과 주택가를 누비는 동안 운전석에 앉은 직원은 운전대에서 손을 뗀 채 차가 잘 가고 있는지 주변만 살폈다. 보조석 대시보드에 설치된 화면에는 도로 주변 지형지물과 사람·차량의 움직임이 실시간으로 표시됐다.

토르드라이브의 자율주행 택배 차량 내부. 운전자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주변을 살필 뿐 운전대에서는 손을 떼고 있다(왼쪽). 토르드라이브의 택배용 차량 두 대가 미국 캘리포니아 팰로앨토의 에이스 하드웨어 매장 앞에 주차돼 있다.

이 차량은 라이다(물체 인식 센서) 4대와 카메라 10대를 이용해 차량 주변 100m 내에서 벌어지는 일을 모두 파악하면서 스스로 판단해 움직인다. 주행하는 동안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량이나 사람, 비보호 좌회전 등 다양한 상황에 마주쳤지만 마치 사람이 운전하는 것처럼 능숙하게 대응했다. 거의 모든 도로 양쪽에 차량이 주차돼 있는 복잡한 상황이었지만 제한속도 25마일(약 시속 40㎞)을 지키면서 차량 흐름에 자유롭게 어울렸다.

토르드라이브 관계자는 "갑자기 공사를 하는 상황, 택배 기사가 도로 중간에 차를 세워놓고 자리를 비운 상황 등 사실상 도심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에 대한 대비가 돼 있다"고 했다.

◇한국형 자율주행차도 활로는 미국에서

토르드라이브가 이날부터 시작한 자율주행 택배 시범 서비스는 에이스 하드웨어 고객들을 대상으로 진행된다. 소방서, 유치원 등 팰로앨토 시내에서 대량의 물건을 주문하는 거래처가 우선적으로 서비스를 받는다. 고객이 전화나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면 매장에서는 자율주행차에 상품을 실어 보내고, 고객은 집 앞에 나가 상품을 받아 오는 식이다.

아직은 운전석에 사람이 앉아 주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지만, 향후 완전한 무인(無人) 서비스로 운행하는 것이 목표이다.

창업자인 서승우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연구실 출신인 계동경 토르드라이브 대표는 "스마트폰 앱(응용 프로그램) 주문 시스템과 정해진 사람만 물건을 차량에서 꺼낼 수 있는 인증 체계 등을 도입할 방침"이라며 "서비스가 활성화되면 24시간 운영되는 매장에서 언제든 주문을 받고 즉시 배송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현되면서 유통의 개념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에릭 하셋 에이스 하드웨어 매니저는 "여러 업체를 파트너로 검토했지만 안전성이나 개발자들의 능력 면에서 토르드라이브가 최적이라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날 시범 서비스 행사에는 지역 관계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에릭 필세스 팰로앨토 부시장은 "자율주행차가 교통과 유통의 미래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면서 "시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토르드라이브의 자율주행 택배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다. 토르드라이브 관계자들도 한국과는 전혀 다른 실리콘밸리 환경에 고무돼 있었다.

계 대표는 "미국 투자자들은 우수한 기술이라면 가능성만을 보고도 아낌없이 투자하고 주정부나 시 당국도 첨단 기술 도입에 맞춰 규제 개선에 적극 나서고 있다"면서 "캘리포니아에 왜 전 세계 업체들이 몰려들어 자율주행 상용화 경쟁을 펼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이는 한국형 자율주행차 개발을 목표로 설립된 토르드라이브가 짐을 싸서 미국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파격적인 규제 완화로 경쟁력 만들어야

자율주행차는 미래 자동차 시장의 판도를 바꿀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보스턴컨설팅그룹은 2025년 자율주행 시장 규모가 420억달러(46조6000억원)로 커지고, 2035년이면 세계 자동차 판매량의 25%를 자율주행차가 차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만 구글·애플·GM·포드·바이두 등 전 세계 60개 기업이 자율주행차 상용화 경쟁을 펼치고 있다.

서승우 교수는 "수백만 마일을 달린 구글의 자율주행차가 앞서가고 있지만 아직 한국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분야도 남아 있다"면서 "특히 글로벌 기업들이 한국의 서울 같은 아시아권 도시에 대한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은 긍정적인 부분"이라고 말했다. 미국과 운전 문화가 완전히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는 충분히 한국 기업들이 승산이 있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자율주행차 시장에서 한국이 경쟁력을 갖추려면 규제 개혁부터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차두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연구위원은 "한국이 파격적인 규제 완화에 나서 기업이 마음껏 활동할 여건을 만들지 못한다면 우수한 스타트업은 모두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