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독특한(unique) 규제들이 많은 '갈라파고스 규제' 국가입니다."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유럽상의) 기자회견. 크리스토프 하이더 유럽상의 총장이 한국 정부에 직격탄을 날렸다. '반(反)기업 규제'를 쏟아내는 한국 정부를 세상의 흐름과 단절돼 있는 '갈라파고스' 섬에 빗대 비판한 것이다.

주한유럽상공회의소가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가진 규제 백서 발간 기자회견에서 유럽상의 소속 기업인들이 발언하고 있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김홍중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상무, 막스버거 만트럭버스코리아 대표, 카스텐 퀴메 네슬레코리아 대표, 줄리엔 샘선 GSK 한국 사장, 우유선 루이비통코리아 이사, 크리스토프 하이더 유럽상의 총장,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유럽상의 회장 겸 메르세데스-벤츠 코리아 대표,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EU 대사, 팽경인 그룹세브코리아 대표.

유럽상의가 한국의 규제 실태에 대해 백서를 발간한 건 올해로 4번째다. 하지만 이번처럼 '작심 발언'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재계에선 "문재인 정부 들어 반기업·친노동 규제가 강화되어도 할 말을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 외국 기업들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유럽상의는 2012년에 설립됐으며, 회원사는 350여 개다. 이 기업들이 한국에서 고용하고 있는 직원은 총 5만명, 매출은 71조원에 이른다.

유럽상의는 이날 한국 정부의 규제 강화와 노동관련법 개정 등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기자회견 전 웃는 얼굴로 담소를 나누던 표정이 어느새 결연하게 변했다. 시작부터 디미트리스 실라키스 주한 유럽상의 회장(메르세데스-벤츠코리아 대표) 등 9명이 돌아가면서 "한국 정부의 규제가 심해져 기업 하기 어렵다"는 취지로 릴레이 발언을 했다.

'갈라파고스 규제'의 사례를 묻는 질문에 실라키스 유럽상의 회장이 답변을 자청했다. 그는 "한국은 자동차의 그라운드 클리어런스(지표로부터 자동차 차축까지의 높이)가 12㎝로 규정돼 있다"며 "이는 유럽은 물론 미국, 일본에도 없는, 전 세계에 한국에만 있는 규제"라고 했다.

뒷줄에 앉아 있던 줄리엔 샘선 GSK (영국 제약사) 한국 사장이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는 "한국은 임상시험에 쓰이는 신종 의료기기를 들여올 때 정식 수입 통관 절차를 밟아야 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국가"라며 "이 때문에 한국은 훌륭한 의료 시스템을 갖추고 있음에도 의료 소비자들이 최신 임상시험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규제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샘선 사장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신약의 약값을 매길 때 기준이 되는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자료를 2006년 이후 고치지 않고 있다"며 "마치 13년 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는 것과 같다"고 꼬집었다. 하이더 총장은 "한국의 노동관련법은 근로자만 과도하게 보호하고 있어 새로운 근로·작업 환경의 변화는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품 분야의 '나홀로' 규제에 대한 발언도 나왔다. 카스텐 퀴메 네슬레코리아 대표는 "한국에선 '천연식품' 표시 자격 기준이 세계에서 가장 엄격하다"며 "사과 퓨레(씨 등을 걸러내고 잘게 분쇄한 식품)를 만들어 한국에 수출하려면 운송 기간 때문에 가열을 해야 하는데, 한국에선 60도 이상 가열하면 천연식품 표시를 내주지 않는다"고 했다.

예년보다 100쪽 늘어난 규제 개선 요구

유럽상의는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진 114쪽짜리 '규제 백서' 책자에 123개의 규제 개선 건의를 넣었다. 작년보다 100쪽 늘어난 분량이다. 유럽상의는 "한국의 기업 관련 규제들은 이해 관계자들과 충분한 정보가 교환되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자주 변하는 경우가 많다"고 비판했다. 한국 정부의 불통에 대한 불만도 나왔다. 유럽상의는 "새로운 정책이 원하는 효과를 제대로 발휘할지 사전에 적절한 평가도 하지 않고 정책이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며 "해외투자를 더 많이 유치하려면 한국 정부가 올바른 환경을 조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주한 유럽상공회의소(ECCK)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유럽 기업 대표들의 한국의 과도한 기업 규제에 대한 비판을 듣고 있다.

현 정부가 기업에 대한 각종 조사·수사를 남발하는 것에 대해서도 유럽상의는 "일부 유럽 기업에 대한 한국 정부기관의 감사 또는 조사 등이 늘었다"며 "몇몇 다국적 기업들 상대로 재정적 처벌 등이 과다하게 요구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당초 60분으로 예정됐던 기자회견은 90분을 넘겨 끝났다. 실라키스 유럽상의 회장은 본지 기자에게 "(한국의 규제 환경 때문에) 기업 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에 함께한 미하엘 라이터러 주한 EU 대사는 "오늘 낸 백서는 유럽상의와 유럽연합이 총 12번의 회의를 거쳐 조율한 내용"이라며 "EU도 발표 내용에 대해 환영하는 입장"이라고 전했다. 한·EU FTA(자유무역협정) 개정 요구도 나왔다. 하이더 총장은 "한국과 유럽연합 간 자유무역협정이 발효된 지 7년이 지나면서 자율주행차, 빅데이터, e커머스 등 새로운 기술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고 했고, 라이터러 대사도 "내년에 한·EU FTA 개정 협상이 개시되길 바란다"고 했다.

30일엔 외국 상의 5곳 공동으로 규제 환경 비판

유럽상의만의 불만이 아니다. 오는 30일에는 주한 미국상공회의소(암참)와 유럽상의, 영국상의, 한불상의, 한독상의 등 한국 주재 외국 기업들을 대표하는 5개 상의가 뭉친다. 이들은 한국 정부 대상 공동 정책 제언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국의 규제 환경에 대한 비판이 나올 전망이다. 한국에 진출한 주한 외국 상의들이 규제 관련 공동 입장을 내는 건 처음이다.

익명을 요청한 재계 관계자는 "문재인 정부 들어 기업에 대한 조사와 수사가 이어지면서 한국 기업과 경제단체는 할 말을 하지 못하고 기업 할 의욕을 잃고 있다"며 "외국 기업들이 나서주니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부끄럽다"고 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는 "그동안 비합리적 규제들이 쌓여왔는데 현 정부 들어 노동 관련 규제마저 중첩되면서 외국 기업들의 불만도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