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널리스트 시절 재무제표가 불안한 대기업을 대상으로 유동성 위기 가능성을 경고하는 리포트를 써 ‘대기업 저승사자’로 통했던 강성부 KCGI 대표이사가 한진그룹에 등장했다. 강 대표는 신한금융투자, 동양종금증권(현 유안타증권) 등에서 크레딧 애널리스트로 활동했다가 2015년 독립한 인물이다. 강 대표는 2005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지배구조 분석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그가 경고했던 대기업 대부분은 유동성 위기 끝에 사라졌다.

KCGI의 자회사 그레이스홀딩스는 한진칼(180640)주식 532만2666주(9.00%)를 경영참여 목적으로 장내매수했다고 15일 밝혔다.

한진칼의 최대주주는 조양호 회장 일가다.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17.84%,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이 2.31%, 조원태 대한항공 사장이 2.30% 지분을 가지고 있다. 한진칼은 기관투자자 지분이 많은 편이라 다른 기관이 KCGI와 공동으로 행동하겠다고 나설 경우 경영권을 흔들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강성부 대표는 "투자대상 기업이 상장사이고, 투자자보호와 공정공시 등 때문에 자세한 투자 이유는 설명할 수 없다"고 했다. 강 대표는 또 "다른 기관투자자들과 접선했거나 어떻게 경영 참여를 하자고 논의한 바는 전혀 없다"고 했다.

◇ 한국판 엘리엇 등장했다…외국계 헤지펀드도 최근 한진칼 매수 국면

"주주행동주의의 서막이 올랐다"(이베스트투자증권 송치호)
"한국판 엘리엇이 등장했다."(주주 게시판)

그레이스홀딩스가 대한항공과 진에어의 지주사인 한진칼의 지분을 9% 매입했다는 소식에 관련주가 16일 장 초반부터 들썩이고 있다. 한진칼(180640)은 전날보다 2400원(9.70%) 오른 2만7200원에 거래되고 있고, ##한진칼우(18064K)는 상한가로 올랐다. 한진칼우는 전날보다 29.76% 오른 1만6350원을 기록 중이다.

증시 관계자들은 그레이스홀딩스가 경영참여 의사를 밝힌만큼 한진칼에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한진칼의 최대주주 지분율이 28.95%에 불과하기 때문에 2대 주주에 오른 그레이스홀딩스가 연기금을 포함한 기관 투자자들의 지지를 받는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현재 한진칼을 보유하고 있는 기관투자자는 크레디트스위스그룹(지분율 5.03%, 9/18기준), 국민연금(8.35%, 8/3기준), 한국투자신탁운용(3.81%, 9/7기준)으로, 이들 기관투자자들의 방향이 매우 중요하다. 만약 이들의 지분율이 주총시까지 유효하고, 모두 그레이스홀딩스를 지지하면 행동주의 펀드가 확보한 지분율은 26%까지 올라간다.

일부 기관은 어느 정도 참여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한 중소형 자산운용사 대표는 "사실 한진그룹은 오너 일가의 도덕성과 관련해 많은 지탄을 받고 있고, 우리도 내부적으로 경영참여 가능성을 검토했었다"면서 "그레이스홀딩스의 요구 사항이 우리의 투자 목적과 부합한다고 판단되면 동참할 수 있다"고 했다.

강성부 대표

증권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진칼을 매수한 외국인 투자자 중 일부도 헤지펀드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우에 따라 이들도 그레이스홀딩스와 협력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셈이다.

◇ 그레이스홀딩스, 한진칼에 어떤 요구할까

증시 관계자들은 그레이스홀딩스가 한진칼 측에 배당을 요구하거나, 이사회 구성원 일부를 교체하자고 요구할 수 있으리라고 봤다. 또 선제적으로 전자투표제를 도입하자고 요구해 개인 투자자들의 그레이스홀딩스 지지를 유도할 수도 있다고 봤다. 자본시장법에 따라 2대 주주인 그레이스홀딩스는 주주제안권, 주주총회 소집청구권 등 한진칼의 주요 정책 결정에 속속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광범위한 주주제안이 가능하다.

사안에 따라서는 주주총회를 통한 표 대결도 발생할 수 있다. 한진칼 측에서 배당 확대 등 주주 환원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지 않는다면 그레이스홀딩스는 주총을 통해 상황을 해결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통상적으로 행동주의펀드는 보유지분 고지 → 주주제안 → 주총 청구 등의 방식으로 투자 목적을 달성한다. 이한준 KTB투자증권 연구원은 "적대적 인수합병을 하려는 것이 아닌데도 확보 지분율이 상당해 자연스럽게 표 대결로 갈 가능성을 생각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 왜 한진칼이었을까

행동주의 펀드가 한진칼에 겨누고 나선 데에는 여러 가지가 이유가 있다.

사회적으로는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 논란이 펼쳐졌다. 이 논란은 한진그룹의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조양호 회장이 수차례 검찰 조사를 받은 점도 투자자들을 불안케했다. 국민연금은 실제로 대한항공 대표 등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국가기관이 조사하고 있는 사안들에 대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경영권에 영향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결방안을 청취할 필요를 주장한 바 있다.

송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한진칼은 경영진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시위 및 총수일가의 이슈 여파로 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필요성이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기업"이라며 "행동주의투자의 핵심인 사회적 지렛대를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업 사례"라고 판단했다.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왼쪽)과 장녀인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기업가치를 끌어올릴 여러 방편이 있다는 점도 행동주의 펀드가 한진칼의 지분을 매입한 이유다. 증권업계에서는 한진칼이 보유한 상장 자회사와 비상장 자회사의 보유가치가 2조원 수준일 수 있다고 본다. 한진칼은 대한항공(29.6%), 진에어(60.0%), 한진(22.2%) 등의 상장사와 칼호텔네트워크(100.0%), 토파즈여행정보(94.4%), 정석기업(48.3%) 등의 비상장사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날 주가가 급등했음에도 불구하고 한진칼의 시가총액은 1조6000억원 수준이다.

그룹 내 유휴자산이 장부가로 반영돼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업가치가 늘어날 여력은 더 크다. 한진그룹은 서울 송현동 부지 1만1000평(3630억원), 인천 율도 3만3000평(1890억원), 제주도 정석비행장 38만평(450억원), 제주도 민속촌 5만평, 제동목장 등을 보유하고 있다.

비교적 손쉽게 배당확대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도 행동주의 펀드가 한진칼을 겨냥한 이유라고 보는 이들도 많다. 배당을 확대하면 조양호 회장 일가에게 흘러가는 돈이 그만큼 늘어나는 것인만큼 한진칼이 배당확대에 쉽게 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행동주의 펀드 입장에서는 손쉽게 투자 수익을 누릴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