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원전 갈등]⑰

대통령 직속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지난달 강정민 전 위원장의 사퇴와 올 7월 비상임위원 4인의 사퇴로 기능이 마비됐다. 강 위원장과 비상임위원 4인은 모두 ‘최근 3년 이내 원자력 이용자로부터 연구개발과제를 수행한 사람은 당연 퇴직한다’는 원안위법(10조)을 위반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2011년 10월 원자력안전 규제 전문기관으로 출범한 원안위는 위원장, 사무처장, 비상임위원 7인이 이끈다. 하지만 현재 사무처장(위원장 직무대행)과 비상임위원 3인만 남아있어 의결정족수(5인)도 채우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완공돼 1년 이상 운영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신고리 4호기 등 의결이 필요한 중요 안건을 처리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 출신인 신용현 바른미래당 의원은 "3년 임기 중 1년도 채우지 못할 사람을 위원장으로 임명한 부실 인사검증시스템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면서 "합의제 기구인 원안위가 사실상 기능마비 상태이며, 원자력안전을 제대로 챙길 수 있다고 기대하긴 어렵다"고 말했다.

원자력 산업계·학계는 지금처럼 원안위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혹한기에 전력수요가 몰리면 원전 가동과 안전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고 우려한다.

◇ 원전 정비일수 탈원전 선언 후 급증…원안위 판단 정권따라 달라져

박성중 자유한국당 의원이 원안위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원전 1기당 평균 정기검사 기간은 2011~2016년 사이 35.5~106.4일이었지만, 탈원전을 선언한 문재인 정부 출범 첫해인 지난해 282.8일로 크게 늘었다.

원안위는 검사기간이 급증한 것이 원자로건물철판(CLP)의 배면부식에 따른 정비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지난해 5월 정기검사를 실시한 한빛 4호기는 CLP 부식을 이유로 아직도 가동 중지 상태다. 그러나 한빛 4호기와 같은 공법으로 건설된 ‘쌍둥이 원전’ 한빛 3호기는 2016년 10월 원안위가 "일부 경미한 정도의 녹 발생 및 도장 손상이 발견됐지만 보수는 필요 없는 상태"라고 결론을 내렸다.

유사한 CLP 부식을 두고 점검자의 주관에 따라 ‘경미한 정도’와 ‘심각한 상황’으로 판단이 바뀌는 것은 고무줄 안전기준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원안위가 점검기간을 늘리면서 2015년 86.5%에 달했던 원전 가동률은 올 8월 62.9%까지 떨어졌다.

박성중 의원은 "원안위가 원자력안전위원회가 아니라 사실상 원자력폐지위원회 수준"이라며 "일선 현장에서 탈원전 원안위원의 눈치를 보느라 가동이 가능한 원전까지 멈춰 세우고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 미국·프랑스, 원자력위원장 인사청문회 실시…친원전·반원전 인사 걸러내

전문가들은 원안위가 제대로 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위상을 높이고 전문성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원안위는 2011년 출범 당시 위원장이 장관급이었으나 박근혜 정부에서 차관급으로 위상이 낮아졌다.

아울러 위원장이 국회 인사청문회 대상이 아니고 국무총리 제청으로 임명돼 정부의 입김에 휘둘릴 우려가 많다는 지적도 나온다.

원자력 선진국으로 불리는 미국과 프랑스는 원자력규제위원회 위원장 후보가 의회의 인사청문회를 거치도록 하고 있다. 청문회 과정에서 친원전 또는 반원전 편향 인사를 걸러내고 위원장의 전문성을 판단하는 것이다.

일례로 크리스틴 스비니키 미 원자력규제위원회(NRC) 위원장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민주당) 시절 추천됐고 2008년부터 NRC를 11년째 이끌고 있다. 그는 지난해 초 트럼프 행정부(공화당) 출범 이후에도 연임에 성공했다.

정동욱 중앙대 교수(에너지시스템공학부)는 "프랑스의 경우 한국처럼 원자력규제위원회 위원장이 직무수행을 할 수 없는 사유가 있지 않는한 임의로 사임하지 못한다"면서 "미국은 원자력 규제행정·기술 기관이 통합돼 있는데, 우리나라도 원안위의 기술전문성을 보완하기 위해 원자력안전기술원 등을 합치는 것이 의사결정에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