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대현 대한민국 명장이 옻칠을 하고 있다.

중국은 진주와 소라 조개 껍데기로 문양을 만드는 나전(螺鈿)이 유명하다. 동서남북 바다로 둘러싸인 일본은 습기에 강한 옻을 이용한 칠기(漆器) 제작이 뛰어나다. 하지만 중국과 일본 사이의 한국은 영롱한 나전에 보존성이 우수한 옻칠을 결합한 ‘나전칠기(螺鈿漆器)’로 아성을 구축했다. 중국과 일본에서도 인정받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뛰어난 예술성과 실용성 덕분에 고려시대 벽란도를 찾은 동아시아와 아라비아 상인들이 가져갔다.

나전칠기의 명성은 과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다. 전통 문화재로 뿐만 아니라 생활용품으로도 수요가 존재한다. 작성품이 우수하고 실제 생활에서 사용이 가능하니 찾는 이가 끊이지 않는다.

경기도 곤지암에 있는 수곡(守谷) 공방을 찾아 대한민국 나전칠기 명장 1호 손대현 선생을 만났다. 공방은 크지 않은 2층 건물이었다. 단풍이 물들기 시작한 산기슭 한 켠에 조용히 자리잡아 가을 운치가 물씬 풍겨났다.

공방에 들어서자 입구부터 뿌옇게 가라앉은 먼지가 기자를 맞았다. 쾌쾌한 먼지 냄새가 아니라 시골집 근처 언덕에서 자라던 옻나무 수액의 독특한 향이 느껴졌다.

손대현 명장은 칠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젊은 얼굴이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도 매끄러운 얼굴의 밝은 미소 때문이었다.

손대현 명장이 작품 전시실에서 나전칠기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기자와 악수를 하는 그의 손은 거뭇거뭇한 옻 수액이 묻어 있었다. 15살부터 70살까지 55년 동안 나전칠기장으로 살아온 세월의 흔적이라고 했다. 손 명장을 따라 공방에 들어서자 작업이 한창이었다. 언듯 보기엔 무질서해 보였지만 누구 하나 한가로운 이가 없었다. 어떤 이는 옻칠을 하고, 다른 이는 옻칠한 작품을 건조장에 옮기는 작업을 했다. 가구에 칠한 옻을 미세한 입자의 사포로 갈아내는 이도 볼 수 있었다. 공방에 들어서자마자 볼 수 있었던 뿌연 먼지의 정체였다.

2층에 마련된 전시실에서 그의 작품을 볼 수 있었다. 자개가 내뿜는 다양한 빛과 생동감 넘치는 문양, 머리카락 크기의 흠조차 없이 반질반질한 검은 옻칠 작품은 문외한이 봐도 매력적이었다. 단아한 귀부인 같았다. 나전칠기 작품을 찾는 이들이 여전히 존재하는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진행한 손 명장과의 인터뷰는 격의 없고 한없이 부드러웠다. 작업이 밀렸다고 했지만 중저음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쳐났다. 학업이 길지 않았다지만 ‘문리(文理)’를 깨우친 이의 ‘아우라’도 느껴졌다.

작품들이 사람을 혹하게 하는 매력이 있다.

"고맙다. 내 노력도 있겠지만 나전칠기가 가진 예술성과 우수성 때문일 것이다. 나전칠기는 영롱한 무지개 빛을 뿜어내는 나전과 검지만 광택이 나는 칠기의 우아한 성질을 모두 지닌 것이 매력이다. 15살 때 시작한 나전칠기 작업이 이제 55년이 흘렀다. 그동안 작품을 만들 때 나름 혼신을 힘을 담았다. 크기가 작아도 해도 심혈을 기울이지 않은 작품이 없다."

나전칠기를 만들 때 쓰이는 각종 전복과 소라 껍데기.

친숙한 단어지만 나전칠기를 설명할 수 있는 이는 의외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나전칠기에 대해 설명해 달라.

"나전은 소라와 전복 색에 맞춰 겉껍질을 갈아 내고 그 속에 조개 빛을 문양화한 공예품이다. 칠기는 어떤 형태의 기물에 옻칠을 반복해 마감하는 것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나전과 칠기의 장점을 딴 우리의 전통 공예품이다. 컨버전스(융합)의 산물이다.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나전칠기 가구를 예를 들면 백골(아무런 장식도 없는 나무 장)에 나전으로 문양을 만든 뒤 옻을 칠하고 갈기를 수없이 반복해 만든다. 이렇게 만들면 나전의 영롱한 빛과 칠기의 은은한 광택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나전칠기 가구가 탄생한다. "

칠 재료로 옻 수액을 사용하는 이유는.

"옻 수액은 마르면 다른 화학 도료로 구현할 수 없는 깊고 그윽한 빛을 낸다. 습기와 벌레, 열에도 강하다. 나무에 발랐을 때 나무가 뒤틀리지 않게 잡아주는 힘도 있다. 이렇게 훌륭한 도료가 또 있을까 싶다."

-나전칠기를 시작하게 된 배경은.

"1949년 황해도 장연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1·4 후퇴 때 홀어머니와 월남해 제주도와 부산, 경기도 포천과 문산, 서울 등 이곳 저곳 떠돌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신산하게 살다보니 중학교에는 진학하지 못했다. 친구 소개로 서울역 근처 사무실에 일하러 다녔는데, 그 건물 2층에 나전칠기 작업장이 있었다. 시간날 때마다 작업하는 모습을 구경도 하고 어른들 담배 심부름도 했다. 한번은 완성품을 포장하는 날이었는지 자개가 박힌 보석함과 쟁반을 상자에 넣고 있더라. 무지개처럼 반짝이는 자개 빛깔을 보는 순간 푹 빠져버렸다. 이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고 ‘칠쟁이’로 나섰다.

당시 작업장에서 하던 칠은 천연 옻칠이 아니라 합성 도료인 캐슈 칠이었다. 그곳에서 3년간 일을 하면서 귀동냥으로 옻칠의 세계를 접했다. 한국 옻칠의 대가인 김봉룡, 민종태, 김태희 세 분 선생님도 알게 됐다. 그 중 수곡 민종태 선생님이 일도 많이 하고 인품도 넉넉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직접 뵙지 못했지만 혼자서 존경하고 흠모했다. 짝사랑이었다.

옻칠을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1968년 연락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성남에 있는 민 선생님의 작업장을 찾았다. 그날은 민 선생님을 뵙지 못했다. 발길을 돌리면서 꼭 배우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다. 이후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찾아갔다. 마침내 한 자리가 비었을 때 출근하라는 허락을 받았다.

스승님의 공방은 일본 고객과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의 주문을 도맡았다. 소목부와 조각부, 옻칠부, 나전부 등 직원이 서른 명이나 되는 큰 규모였다. 일을 제대로 배우려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공방 바로 옆에서 친구와 자취하면서 퇴근 후에도 공방에 들러 아무도 없는 작업장을 청소하고 습기가 부족하면 물을 뿌려 놓곤 했다. 옻칠은 습기가 부족하면 작품이 안나온다. 열심히 했더니 시나브로 동료들이 알아주더라, 마침내 스승님 눈에도 들게 됐다. 옻칠부 책임자였던 선배가 독립해 나갔을 때 그 자리를 꿰찼다. 스물여섯쯤 됐을 때다."

수곡공방 작업장 모습. 어수선한 모습이지만 각자 맡은 일을 하느라 분주했다.

옻을 심하게 타는 사람도 있던데…배우는데 어려움은 없었나.

"일을 배우는 것이 너무나 즐거웠다. 한번도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래도 처음에는 온몸과 얼굴에 옻이 올라 고생했다. 얼굴이 퉁퉁 붓고, 가려워서 긁으면 진물이 났다. 흉했다. 선배들이 '계속 옻칠할 수 있겠느냐'고 걱정해 줄 정도였다. 하루는 '왜 나만 이렇게 옻이 심하게 오를까' 고민하다 기분 전환 겸 기차를 타고 춘천에 다녀왔다. 그런데 그 다음 날 피부가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좋아진 게 아니라 순식간에 좋아진 거다. 너무 신기하고 기쁜 마음으로 공방에 출근했다. 그날 이후 옻을 타지 않는다."
일을 하면서 우여곡절은 없었나.

"스승님의 공방에서 일하던 시절 큰 어려움 없이 즐겁게 열심히 배웠다. 칠 솜씨가 소문났는지 다른 유명 공방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조건이 좋았지만 스승님의 사랑이 각별했다. 스승님이 댁 근처에 방을 얻어주고 작업을 하게 하셨다. 스승님 댁과 불과 5분 거리였는데, 삼시세끼 따뜻한 밥을 보내주셨다.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쉽지 않은 일이었다. 속 깊은 배려였다.

1978년 말 결혼한 뒤 새로운 길을 개척해 보고 싶은 생각에 ‘독립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도 스승님은 선뜻 ‘그러라’며 허락했다. 당신에게 들어 온 주문의 7할을 나에게 맡겼다. 경제가 어려웠지만, 선생님이 일을 주시니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이후 7~8년 정말 일을 많이 했다.

지금도 주문받은 작품만 만든다. 그래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경기가 좋은지 나쁜지도 모른다. 1980년대 자개농 붐이 일었을 때도, 또 자개농에 대한 인기가 사그라질 때도 주문이 크게 줄지 않았다. 진짜 옻칠한, 제대로 만든 작품을 원하는 고객이 항상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주문이 조금 줄긴 했지만 늘 현금 주고 재료를 사고, 작품 값도 현금으로 거래하니 별 문제가 안됐다.

신혼 시절에 살림집 겸 공방으로 세들어 살던 이태원 집이 경매에 넘어간 적이 있었다. 전셋돈도 다 못 건지고 면목동으로 이사 가서 월세를 살았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언젠가는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작품에 열중했다. 그 때 작품을 많이 만들었고 실력도 한층 늘었던 것 같다."

스승과 같은 호를 쓴다. 흔치 않은 일이다.

"원래는 다른 호를 썼다. 수곡은 스승님이 쓰시던 호를 물려받았다. 스승님도 당신의 스승이셨던 전성규 사조(師祖)님으로부터 물려받아 평생 사용했다. 돌아가시기 여섯 달 전에 유언처럼 호의 내력을 일러주시고 물려주셨다. 나름 나전칠기의 종손임을 공인하는 호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척 소중하다. 곤지암 골짜기에 차린 공방 이름도 수곡으로 지은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수곡공방을 짓고 처음에는 이곳에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새 소리가 들리더라. 작업하다 주변을 한 바퀴 돌 때면 행복하고 마음이 편하다."

수곡공방에서 만는 다양한 크기의 나전칠기와 칠기 작품들.

기억에 남는 작품이 있다면.

"1994년 신라호텔에서 초대전을 열었을 때 일본에서 온 70대 노신사가 따로 만나자고 기별이 왔다. 전시회를 보고 가보인 보검의 칼집과 칼자루를 나전칠기로 장식하고 싶다고 했다.

그 분은 작업을 하는 8개월간 네 번이나 찾아와 대접하며 200만원씩 사례하더라. 속으로 이미 받을 만큼 받은 것 같은데, 도대체 얼마를 주려고 이러나 싶었다. 검은 옻칠 바탕에 야광패인 소라 껍데기로 꽃을 만들고 국산 전복으로 줄기와 잎을 은은하게 표현한 모란당초문 자개가 박힌 작품을 전달했다. 얼굴이 변하더라. 이전에 그의 표정은 매우 근엄했었는데, 작품을 보는 순간 소년같이 기뻐했다. 표정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삼층장을 사간 아주머니도 기억에 남는다. 그분이 외출했다가 몹시 불쾌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혼자서 물끄러미 삼층장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언짢은 기분이 사라지고 평화로운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곰곰 생각해보았더니, 바로 삼층장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더라. 아름다운 자개와 옻빛이 어우러진 작품이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는 힘이 있는 모양이다. 그 아주머니는 나중에 세 딸에게 삼층장을 결혼선물로 주고 싶다며 선금을 주고 장롱을 세 개나 맞춰 갔다.

최근에는 한 할아버지가 기억에 남는다. 손자가 용돈을 종이 상자에 모으는 모습을 보고 손자에게 줄 작은 나전칠기 함을 주문했다. 나중에 작품을 배달하러 가서 보니 그다지 부유한 분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사랑하는 손자에게 작품을 물려 주려 적지 않은 돈을 선뜻 쓰기로 하신 뜻이 너무나 고마웠다."

작품 의뢰는 주로 개인만 받나.

"개인 고객도 있지만, 스승님의 작품을 좋아했던 삼성을 포함해 BMW 7시리즈의 내장을 나전칠기로 부탁했던 자동차 회사까지 고객이 다양하다. 스승님은 이병철 삼성 회장의 사무실 집기나 외국으로 나가는 선물을 주로 맡았다. 저는 대형 PDP나 태블릿 PC 등의 외장을 꾸미는 일을 책임졌다. 외국에 나가는 선물이나 리움박물관 기념품 등 전통적인 작품도 주문받았다. 한국 대표 공예품으로 우리 대통령이 외국을 방문할 때나, 외국 원수가 방한할 때 선물로도 많이 나갔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유럽 6개국을 순방했을 때 나비 문양 서류함을 만든 것을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할 때도, 엘리자베스 여왕이 한국을 찾았을 때도 선물을 만들었다."

손대현 명장이 나전위에 옻칠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나전기법이 독특한 이유는 무엇인가.

"나전칠기는 역사가 무척 오래됐다. 그 과정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기법이 발전한 것 같다. 인류가 목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부터 옻칠이 시도됐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옻칠은 중국에서 시작된 걸로 알려졌는데 중국·한국·일본 세 나라에서 특히 발달했다. 일본 학자들은 한나라가 우리 땅에 낙랑군을 설치한 이후 옻칠이 전해졌다고 했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 유적지인 창원 덕천리 유적에서 칠 조각이 발견되면서 우리 옻칠의 역사가 청동기 시대에 시작된 것으로 확인됐다. 아산 석관묘 청동기 유적지에서도 칠편이 나왔고, 창원 다호리 유적지(BC 1세기)에서는 칠기가 20여점 출토됐다. 공주 공산성 유적지에서는 백제시대 옻칠갑옷과 마갑까지 발굴되면서 우리 옻칠의 발전사를 엿볼 수 있다.

일본은 습기가 많은 기후 탓인지 칠기를 널리 써왔고, 옻 재료와 정제기법도 앞서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장인의 기술로만 따져본다면 우리나라가 단연 최고다. 고려시대 확립된 섬세하고 세련된 칠기 기술은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이 때 전복 껍데기와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를 얇게 저며 각질 뒷면에 안료를 칠하는 복채기법이 개발됐다, 조선시대 화각 공예의 시초다.

나전칠기를 우리나라 옻칠 공예의 대표로 꼽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중국도 자개를 쓰지만 우리와 달리 상감하듯 나무를 파서 끼워 넣는다. 일본은 옻칠이 발달했지만, 자개로 장식하지 않고 금가루나 은가루를 뿌리는 시회(蒔繪)기법을 주로 쓴다. 우리만 자개를 붙여 토회작업과 옻칠로 두께를 맞춘 다음 다시 갈아내는 방법을 쓴다."

후학 양성도 하는가.

"다양한 곳에서 기술을 전수했다. 문화재보호재단 전통문화의 집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에서 옻칠반 교육을 맡았다.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는 일반인들이 전통기술을 배울 수 있는 곳인데 소목·매듭·자수·한복 등의 전통분야에 대한 교육이 이뤄진다. 옻칠반의 경우 기초반 2개, 연구반 2개, 전문반 1개로 총 5개의 과정을 운영했다.

강의 초기에는 학생들의 연령대가 30~70대였는데, 나중에는 10대들도 수강하더라. 옻이 올라 고생을 하면서도, 나전칠기의 매력에 빠져 공방을 차리고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어가는 제자들을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해마다 인사동에서 개최되는 ‘옻빛전’이 활성화하는 걸 보면서도 자부심을 느낀다.

요즘에는 서울대에서 강의를 한다. 겨우 초등학교를 마친 내가 한국 최고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똑똑한 제자를 키우다 보니 군자삼락(君子三樂) 중 하나를 알 것도 같다"

군자삼락은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간에 탈이 없는 것 ▲자기의 행하는 일이 온 세상에 떳떳하여 하늘과 남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 ▲천하에 재주 있는 사람을 모아 가르치는 일 등 세가지를 말한다."

55년이나 했으면 지겨울법도 하다.

"아직도 밤에 잠자리에 들 때면 '빨리 내일이 와야 또 일할 수 있는데'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집에서 허락만 해주면 매일 공방에서 먹고 자고 일만 하고 싶다. 스승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고 있다. 스승님은 늘 '겉칠을 번드르르하게 해놓으면 속이 보이지 않지만, 속이야말로 절대로 속이면 안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셨다."

후학들에게 당부와 바람이 있다면.

"시대에 따라 디자인이나 문양은 바뀔 수 있어도 제작과정이나 기법은 바뀌면 안된다. 빨리 하려고, 쉽게 하려고, 제작과정을 바꾸거나 현대화해 버리면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기법을 잃게 된다.

디자이너와 협업해 새로운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면 한국 최고의 전통 공예기술이 세계에 어필할 수 있는 그런 날이 꼭 올 것이라는 믿음도 가지고 있다. 뒤를 이어줄 아들도 있고 제자도 있으니, 이제 우리 옻칠 기술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기만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