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말 한때 세계 최대 가상화폐 거래소로 부상했던 업비트(회사명 두나무)는 이달 말 싱가포르에 새로운 거래소 '업비트 싱가포르'를 설립한다. 신규 거래소 설립은 해외 시장 개척을 위한 거점 마련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탈출(脫出)에 가깝다. 올 초 정부가 규제에 나선 뒤 작년 말 하루 최대 12조원에 육박했던 거래액은 이달 들어 1000억~3000억원으로 급감했다. 거래 수수료가 주(主) 수익인 가상화폐 거래소에 거래액 감소는 직격탄이다.

국내 가상화폐 시장이 싹이 잘릴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의 규제 탓에 성장은커녕 거래액이 급감하자 해외로 나가거나 아예 회사를 매각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업비트와 함께 세계 시장 1·2위를 다퉜던 빗썸이다. 이 회사는 의사 출신인 김병건 BK그룹 회장이 싱가포르에서 설립한 BK컨소시엄에 팔렸다. 이 회사도 매각을 통해 거점을 해외로 옮기는 것이다. 네이버·카카오·넥슨과 같은 대형 인터넷·게임업체들은 아예 한국이 아닌 싱가포르나 일본, 유럽에 가상화폐 사업의 거점을 만들고 있다. 가상화폐 거래소의 한 임원은 "이대로 반년만 더 가면 한국 가상화폐 산업은 몰락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가상화폐 거래소들, 줄줄이 해외로 떠나

국내 가상화폐 시장의 '빅 3'인 업비트·빗썸·코인원은 최근 해외에 가상화폐 거래소를 설립했거나 곧 세울 예정이다. 빗썸은 이달 내 홍콩에 '빗썸덱스'를 설립할 예정이다. 빗썸은 최대주주가 서류상 싱가포르 기업으로 바뀐 만큼, 앞으로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유럽 등지에도 신규 거래소를 세울 것으로 보인다. 코인원은 지난 8월 인도네시아 현지 기업들과 함께 '코인원인도네시아'를 설립했다. 이런 해외 거래소는 국내와는 계정 연결이 안 되는 전혀 별개의 거래소로 운영된다.

가상화폐 시장에 진입하는 네이버는 일본 자(子)회사 라인을 통해 지난 7월 싱가포르에 가상화폐 거래소 '비트박스'를 설립했다. 네이버 측은 "현재로서는 한국에 거래소를 열 계획이 없다"는 입장이다. 카카오는 가상화폐와 블록체인 사업을 총괄하는 자회사를 일본 도쿄에 설립했다. 이곳에서 이달 내 가상화폐 '클레이'를 공개할 계획이다. 국내 최대 게임업체인 넥슨의 지주회사 엔엑스씨(NXC)는 최근 유럽의 가상화폐 거래소 비트스탬프를 3억5000만달러(약 3965억원)에 인수하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NXC는 작년 9월 국내 거래소 코빗을 913억원에 인수했었다. 국내 거래소가 고전하는 상황에서 이번 인수가 성사되면 넥슨의 가상화폐 사업 중심은 비트스탬프의 본사가 있는 룩셈부르크로 바뀔 것으로 보인다.

◇신규 계좌 개설 거부하고 압수수색까지

해외 탈출의 배경에는 정부의 전방위 압박이 있다. 사실 정부가 가상화폐에 대한 명확한 규제안을 발표한 적은 없다. 올 초 박상기 법무부 장관이 "우리나라 가상화폐 거래는 사실상 투기, 도박과 같은 양상을 보인다"며 "거래소 폐쇄까지도 검토한다"고 말하는 등 정부 인사들의 구두 압박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후 은행권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예컨대 업비트에서 가상화폐 거래를 하려면 기업은행에 실명 계좌를 만든 뒤 업비트 가상 계좌와 연결해야 한다. 하지만 기업은행은 2월 이후 업비트 측에 신규 계좌 개설을 허용하지 않고 있다. 업비트는 다른 은행들에 제휴를 요청했지만 모두 거절당했다. 신규 고객 확보의 길이 막힌 것이다. 여기에 대형 가상화폐 거래소는 예외 없이 모두 검경의 수사를 받았다. 올 1월 코인원이 마진 거래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고 2월에는 빗썸이 해킹 사건과 관련해 압수수색을 당했다. 5월에는 업비트가 전산 위조 혐의로 압수수색을 받았다. 심지어 중소벤처기업부는 이달 '벤처특별법 시행령'을 개정하면서 가상화폐 거래소를 도박장·술집과 함께 벤처 인증 대상에서 제외하기도 했다.

여기에 금융위원회가 가상화폐공개(ICO)를 금지하면서 국내 가상화폐의 유동성도 약해졌다. ICO(Initial Coin Offering)는 기업이 사업계획서를 공개하고 가상의 코인을 발행해 투자자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사업 자금을 확보하는 것이다. 최근 4년간 전 세계 ICO 자금 조달은 약 200억달러(22조7000억원)로, 이 가운데 한국 기업이 발행한 규모는 5억4430만달러다. 하지만 한국 기업의 ICO는 전부 해외에서 이뤄졌다. 이병태 카이스트 교수는 "부작용을 막는 적절한 규제는 필요하지만 지금 정부는 거래 자체를 봉쇄하는 규제를 하고 있다"며 "앞으로 4~5년간 육성을 잘하면 일자리 5만~6만개를 창출할 산업을 정부가 규제의 칼로 잘라버리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