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를 세운 지 33년이 된 비철(非鐵) 기업 A사 대표는 요즘 "사업 접을 날이 가까워지는 것 같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최저임금 인상, 근로시간 단축에다 글로벌 무역 전쟁 등의 각종 악재가 이어지는 데다 온실가스 배출권〈키워드 참조〉 문제까지 불거져 엎친 데 덮친 격이 됐기 때문이다. 연간 영업이익 200억원인 이 회사가 지난해 온실가스배출권 구입 비용으로 쓴 돈이 50억원. 영업이익의 25%에 달한다. 회사 대표는 "각종 규제로 갈수록 사업 경쟁력이 떨어지고 있는데, 온실가스배출권 부담이 올해는 더 늘어날 예정이라 감당이 안 된다"고 말했다.

이달 말 발표 예정인 '2차 온실가스 감축 계획' 확정을 앞두고 산업계가 비명을 지르고 있다. 특히 중소·중견 기업이 대부분이고 제품 생산 과정에 온실가스를 많이 내보내는 철강·비철금속 업계는 "점점 강도를 높이고 있는 정부의 온실가스 배출 축소 할당량에 맞추려면 생산량을 줄일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의 온실가스 관련 제도는 다른 나라보다 훨씬 강력할 뿐 아니라 우리 정부는 아직 개별 기업별 할당량조차 정하지 않은 상태다.

"온실가스 감축은 생산량 감축 정책"

국제사회는 2015년 12월 새로운 기후체제 합의문인 '파리협정'을 채택했다. 우리나라는 2030년 온실가스를 전망치보다 37% 줄이겠다고 약속했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는 이를 지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다. 온실가스를 많이 내보내는 기업에 연간 배출 가능한 양을 정해주고, 기업은 그 범위 내에서 배출하도록 했다. 이를 초과하면 돈을 주고 배출권을 사야 한다. 정부는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1차 계획'을 시행했고, 올해부터 2020년까지 2차 계획을 세우기로 했다.

업계에서는 2차 계획 기간 동안 국내 발전·산업 부문은 온실가스 2억5800만t을 감축시켜야 한다고 예상하고 있다. 배출권거래제 대상 기업 591개로 나누면 1개 업체당 평균 44만t을 감축해야 한다는 얘기다.

배출권 가격 2만2500원(정부 시장안정화 경매가격)으로 환산할 경우 평균 99억원의 감축 비용이 발생한다는 계산이다. 해당 비용은 생산원가에 고스란히 반영될 수밖에 없다.

특히 중소·중견 철강·비철금속 업체들은 "정부의 늘어난 온실가스 배출권거래제 할당량을 맞춰 배출권을 사기에는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생산량을 줄이는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 판"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1차 감축 기간 동안 많은 기업이 수백억원을 들여 배출권을 구매하거나 과징금을 냈다. 1차 계획 기간 중 장내와 장외에서 총 8515만t이 거래됐고, 총 거래 금액은 1조7120억원에 달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비철 업체 대표는 "가뜩이나 수익성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배출권 비용까지 겹쳐 기업의 생존이 위태로워지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예측 불가 정책에 "국내 기업만 경쟁력 하락"

산업계에서는 국내 기업 역차별로 인한 국가 경쟁력 약화도 우려하고 있다. 세계 최대 탄소배출국 중 하나인 미국은 최근 파리협정에서 탈퇴했다. 미국과 함께 경쟁국인 일본 등 주요 국가들은 국가 단위의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하지 않고 있다.

배출권 거래는 국제적인 호환성도 부족하다. 배출권거래제를 국가 단위로 시행하고 있는 곳은 우리나라를 포함해 EU, 스위스, 뉴질랜드 등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배출권 거래 기업도 국내 591개사로 국한돼 작은 충격에도 가격 변동이 크게 일어날 수밖에 없다.

예측 불가 정책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배출권거래법에 따르면 정부는 지난해 말까지 할당 기준, 할당량, 할당 방식을 공표해야 했지만 올해 들어서야 할당 기준만 정해지고, 개별 기업 할당량은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다. 업계에서는 "정책의 불확실성으로 인해 기업들이 잉여 배출권을 시장에 내놓지 않아 배출권 가격이 더 올랐다"고 지적하고 있다.

☞온실가스 배출권 거래제

기업별로 배출할 수 있는 할당량을 정부가 정하고, 이를 초과해 내보내는 기업은 돈을 주고 배출권을 구입하도록 하는 제도다. 할당량보다 적게 배출하는 기업은 배출권을 팔 수 있다. 배출권을 사는 것보다 싸게 온실가스를 줄일 수 있는 기업은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도록 유도하고, 비용이 많이 드는 곳은 배출권을 사도록 하는 방식이다.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500여 개 기업을 대상으로 하며 한국거래소가 거래 중개를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