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유가가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중동 지역 산유국의 지정학적 리스크로 촉발된 유가 상승 움직임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국내 산업계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특히 항공‧해운 등 유류비 지출이 많은 운송업계는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제유가 상승이 산업계 뿐 아니라 국내 소비자 물가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8일 한국석유공사 유가정보시스템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 26일 싱가포르에서 거래된 두바이 현물 가격 추정 값은 배럴당 80.04달러로 작년 9월 26일 56.15달러 대비 42.5% 올랐다. 두바이유는 한국에서 주로 수입하는 원유로 배럴당 80달러를 넘은 것은 2014년 11월 10일 이후 처음이다.

영국 ICE 선물시장에서 거래된 브렌트유 선물 가격도 배럴당 81.34달러를 기록해 80달러 선을 넘었다. 미국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거래된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 가격은 배럴당 71.57달러로 38% 올랐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두바이유 가격은 배럴당 64~66달러에 머물고 있었지만, 지난 4월 미국이 시리아를 공습한 이후 급등하기 시작했다. 두바이유 가격은 지난 4월 19일 이후 두 차례를 제외하고 70달러 수준을 유지해 왔다. 잠시 안정세를 보이던 국제유가는 오는 11월 5일로 예정된 미국의 이란 원유수출 전면금지 제재를 앞두고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유가 상승세는 지난 23일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비(非) OPEC 회원국이 원유 증산 가능성을 배제하면서 힘이 실렸다. 일각에서는 국제유가가 2014년 이후 처음으로 배럴당 100달러를 넘어설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조선일보DB

◇ 희비 갈리는 항공‧해운업계와 정유업계

유가 상승 움직임에 가장 긴장하고 있는 곳은 항공, 해운 등 운송업계다. 운송업은 영업원가 가운데 유류비 비중이 크기 때문에 국제유가 등락에 따른 손익 변동이 심한 산업으로 꼽힌다. 항공사나 해운사의 연간 유류소모량은 일정 수준이 유지되는 반면 국제유가는 산유국의 지정학적 위험, 주요국의 원유재고 수준, 상품시장 투기수요, 셰일가스 영향 등에 따라 변동성이 크기 때문에 대처하기가 어렵다.

대한항공(003490)은 연간 연료유 3300만배럴을 소모하는데 국제유가가 배럴당 1달러 오르면 3300만달러(37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아시아나항공(020560)도 연간 1700만배럴 수준의 연료유를 쓴다. 국제유가 급등이 수익성 악화로 직결되는 구조다. 대한항공은 지난 2분기 전체 영업비용이 2조931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2418억원) 증가했다. 특히 전체 영업비용의 27%를 차지하는 연료비는 7914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29% 늘었다.

현대상선도 원가의 10% 안팎을 차지하는 선박연료비 상승이 골칫거리다. 선박연료유 값은 지난 2분기 1t당 403달러로 전년 동기(1t당 318달러) 대비 26% 올랐다. 선박연료유가 t당 400달러를 넘긴 것은 2014년 12월 이후 처음이다. 현대상선이 올해 상반기 매입한 연료유 규모는 3247억원으로 작년 상반기보다 10% 늘었다. 같은 기간 팬오션(028670)연료유 구매액도 2263억원에서 2638억원으로 16% 증가했다.

정유업계는 국제유가 상승으로 재고 마진율이 높아졌을 뿐 아니라 정제마진도 나쁘지 않다. 정제마진은 정유사 수익성을 나타내는 지표로 휘발유‧경유 등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유 가격‧수송비 등 비용을 뺀 것을 말한다. 정유사는 정제마진이 높을수록 이익이 늘어나는데, 3분기 전망은 나쁘지 않다. 올해 3분기 정제마진은 배럴당 6.8달러로 직전 분기 대비 1.1달러 올랐다. 다만 유가 상승이 장기화될 경우 정제마진이 하락할 수 있기 때문에 안심할 수 없다는 분석도 있다.

정유사 화학사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파라자일렌(PX) 스프레드 시황 개선도 희소식이다. PX는 원유 부산물인 나프타로 만드는 중간 원료로 이를 이용해 합성섬유와 페트병을 생산한다. PX 스프레드는 PX 가격과 원재료 나프타 가격 차이를 나타내는데, 3분기 평균 t당 501달러로 직전 분기 평균 344달러보다 157달러 올랐다. 백영찬 KB증권 연구원은 "정제마진과 PX 스프레드 상승 때문에 정유산업의 3분기 실적 호전이 예상된다"고 했다.

◇ 국제유가 오르면 소비자물가도 따라 올라…서울엔 L당 2300원 넘는 주유소 등장

국제유가 상승이 계속될 경우 국내 물가도 함께 상승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최근 국회 예산정책처가 발표한 ‘국제유가 상승이 국내물가에 미치는 영향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10% 오르면 수입물가는 2개월 후 최대 6.5% 오르고, 생산자물가는 1개월부터 상승하기 시작해 5개월 후 0.62%까지 오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비자물가는 2개월부터 상승해 5개월 뒤 최대 0.15% 올랐다.

국제유가 상승으로 인한 충격은 석유류 제품, 교통, 주택‧수도‧전기 및 연료 부문 순으로 큰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휘발유 값이 빠르게 오르고 있다. 오피넷에 따르면 지난 27일 국내 평균 휘발유 값은 1L당 1651.4원으로 2014년 12월 17일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 중이다. 12주 연속 상승을 기록 중이다.

문제는 국제유가 상승 움직임에 따라 더 오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한국석유공사는 "국제유가가 5주 연속 상승함에 따라 국내제품가격도 오름세을 보일 것"이라고 했다. 전국에서 가장 비싼 서울 지역 평균 휘발유 값은 1L당 1738.8원으로 전국 평균 가격보다 87원 높다. 서울 시내에만 L당 2300원이 넘는 초고가 주유소가 3곳이나 있다.

오현희 국회예산처 경제분석국 분석관은 "유가상승이 소비자물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며 "단기적으로 유가변화에 따라 가격 변동성이 높은 품목에 대한 물가안정 노력을 강화해야 하고, 중장기적으로 해외자원 개발 확대‧수입선 다변화‧효율적인 원유 비축 계획 수립 등을 통해 원유수급 안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