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납액 연간 80억원 달해...여신협회는 팔짱만

연간 80억원에 이르는 비자카드 해외결제수수료 인상분을 놓고 카드업계가 고심하고 있다. 소비자에게서 인상분을 받으려면 카드상품 약관을 고쳐야 하는데, 금융감독원은 소비자 보호를 내세워 반대하고 있다. 카드사가 당연히 받아야 할 몫까지 금감원이 제한하는 건 과도한 처사라는 볼멘 소리가 나온다. 벌써 일부 카드사는 약관 변경을 포기하고 있다. 카드업계의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여신금융협회가 아무런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27일 금융감독원과 카드업계에 따르면 일부 중소 카드사가 비자카드 해외결제수수료 인상분을 소비자에게 부과하지 않기로 내부적으로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감원과 카드업계가 이 문제를 논의할 계획인데, 그에 앞서 일부 카드사가 금감원의 입장을 감안해 수수료 인상분을 자체 부담키로 한 것이다.

비자카드 해외결제수수료 문제가 불거진 건 작년이다. 내국인이 해외에 나가서 카드를 결제하면 국내 카드사들은 비자카드 같은 글로벌브랜드 카드사에 해외결제수수료를 납부한 뒤 해외에서 비자카드를 사용한 고객에게 이 비용을 물리고 있다.

그런데 비자카드가 지난해부터 해외결제수수료율을 1.0%에서 1.1%로 올리면서 문제가 생겼다. 국내 카드사들은 "비자카드가 시장지배적 우위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수수료를 올렸다"며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한 뒤 0.1%포인트 인상분에 대해선 대신 납부해 왔다. 비자카드가 수수료를 올리기 전에 적용되던 1%의 해외결제수수료는 카드상품 약관에 명시돼 있지만 인상분을 적용하기 위해선 약관을 새로 만들어 금감원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공정위 제소 결과에 따라 수수료율이 다시 1%로 낮아질 수 있다고 보고 카드사들이 일단 상황을 지켜본 것이다.

그러나 공정위가 비자카드의 손을 들어주면서 상황이 복잡하게 꼬였다. 수수료 인상을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카드사들은 소비자 대신 비자카드에 납부하던 해외결제수수료 인상분을 어떻게 할지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 국내 카드사가 부담하는 비자카드 해외결제수수료 인상분은 연간 8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소비자에게 인상분을 부담하게 하려면 금감원의 승인을 거쳐 카드상품 약관을 변경해야 하는데, 금감원은 약관 변경에 반대하고 있다. 금감원 관계자는 "소비자 보호의 차원에서 인상분을 소비자에게 전가하는 게 맞는지 따져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카드업계에서는 해외결제수수료 인상분 대납 문제는 소비자 보호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데 금감원이 과도하게 카드사의 권리를 제한한다고 보고 있다. 해외결제수수료는 카드 이용자가 해외에서 쇼핑을 하면서 발생하는 건데 이런 부분까지 카드사가 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서민이나 소상공인을 위하는 일이라면 카드사들도 손해를 감수하고 도울 수 있지만, 해외 여행객이 비자카드 가맹점에서 카드를 긁으면서 생긴 수수료까지 카드사가 부담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며 "소비자 보호를 위한 것이라면 국내 카드사가 아니라 애초에 수수료를 갑자기 올린 글로벌브랜드카드사에 문제제기를 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카드업계는 금감원이 소비자 보호를 전가의 보도처럼 앞세워 무리하게 수수료 인상분 대납을 강요하고 있다는 입장이지만, 일부 중소 카드사는 금감원의 입장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시장점유율이 낮은 일부 중소 카드사 입장에서는 수수료 인상에 따른 추가 부담이 크지도 않은데다 이런 논란을 점유율을 높이는 계기로 보고 있다"며 "금감원과 맞선다고 해서 실익이 크지도 않다는 판단도 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인상분 대납에 따르는 부담이 큰 대형 카드사는 여전히 약관 변경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판단하고 있지만, 중소 카드사들이 백기를 들면서 금감원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카드사들의 입장을 조율하고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여신금융협회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카드사 관계자는 "여신금융협회가 이런 문제에서 목소리를 내고 회원사들의 이익을 대변해야 하는데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며 "협회가 아닌 개별 카드사가 금감원의 입장에 반대 목소리를 내는 건 쉽지 않다"고 하소연했다.

이에 대해 여신금융협회는 금융당국에 카드사의 입장을 전달하는 등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고 밝혔다. 여신금융협회 관계자는 "개별 계약 사안이라 사업자 단체인 협회가 중간에서 조율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며 "금융당국과 카드사가 원활하게 협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