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원 박모(43)씨는 아들의 초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잠실 쪽 아파트 전세를 알아보던 끝에 처가에서 3000만원을 빌리기로 아내와 합의했다.

목표로 삼았던 잠실엘스 전용면적 84㎡ 전세금이 예산 범위 밖으로 뛰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분명 두어 달 전까지만 해도 7억원대 후반이었는데, 잠깐 잊고 있다가 다시 알아보니 벌써 8억원대 중반이더라"며 "정부는 서울 동남권에 새 입주 아파트가 많다고 했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 같은 전세금 급등은 최근 한두 달 사이 서울 전역에서 벌어지고 있다. KB국민은행에 따르면, 9월 둘째 주 서울 아파트 전세는 0.16% 올랐다. 성북구가 0.4%로 가장 많이 올랐고, 중랑구와 금천구는 0.35%씩 올랐다. 관악(0.29%)·동작(0.24)·서초(0.23%)구도 많이 올랐다. 5대 시중은행의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올해 7월 말 56조3466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시점(39조2289억원)에 비해 43.6% 급증했다.

정부 측은 "가을 이사철이 시작된 데 따른 계절적 요인이 크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최근 1개월 전세금 상승률은 작년·재작년 9월의 2~3배 수준이다. 전문가들은 "수요·공급 상황과 정부 규제 등이 복합적으로 맞물리면서 전세 시장에 영향을 준 것"이라고 본다.

◇준공 아파트보다 많은 재건축 철거 아파트

전세 시세 급등의 1차적 원인은 공급 부족이다. 그동안 국토교통부는 연간 아파트 준공 가구 수를 근거로 "서울 주택 공급이 크게 부족하지 않다"는 논리를 펴왔다. 하지만 이는 재건축·재개발을 위해 철거한 '멸실(滅失) 가구'라는 변수를 무시한 것이라는 지적이다.

부동산 전문가인 김현아 국회의원이 국토부와 서울시 자료를 분석한 결과, 서울시내 아파트 준공 가구에서 멸실 가구를 뺀 '순증(純增) 가구'는 2013~2014년 3만 가구가 넘었지만, 2015~2016년에는 2만 가구대로 줄었고, 작년에는 1만4491가구가 됐다. 김 의원은 "서울 아파트 시장에서 순증량이 줄어드는 시기와 가격 상승이 시작된 시기가 정확하게 겹친다"고 말했다.

올해는 더하다. 교보증권에 따르면, 올해 서울의 준공 예상 아파트는 3만6371가구이지만, 멸실 예상 아파트는 4만3254가구다.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제를 피해 작년 말 관리처분인가 신청에 한꺼번에 몰렸던 단지들이 올 하반기 줄줄이 이주(移住) 행렬에 나섰기 때문이다. 7월 서초구 신반포3차·경남 아파트(2600여가구)가 철거를 위해 집을 비우기 시작했고, 송파구 미성·크로바(1300여가구) 도 이주를 준비 중이다. 그 결과 올해 서울 전체 아파트 가구 수는 6883가구 감소할 전망이다. 최근 10년간 겪지 못한 현상이다.

◇규제로 매매 거래 줄며 전세 시장 적체

정부 규제가 전세 시장을 왜곡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결혼하면서 전세로 살다가 30대 중반~40대에 내 집을 사는 전형적인 한국인 주거 이동 공식이 규제로 깨졌다"며 "예전 같으면 집을 샀어야 할 사람까지 전세 시장에 눌러앉으면서 수요가 늘어난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매매 시장에서는 4월 양도세 중과(重課) 이후 거래량이 급감했다. 올해 7월 거래량은 5852가구. 작년 같은 기간(1만5168가구) 3분의 1에 불과하다. 5월과 6월도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면서 가격은 급등했다. 서울 아파트값은 8·2 대책 이후에만 1년간 16% 올랐다. 집값이 올랐는데 대출은 LTV(담보대출비율)가 60%에서 40%로 줄었다. 내 집 마련 문턱이 높아진 것이다.

정부가 각종 대책으로 다주택자를 옥죈 것이 결과적으로 세입자 부담으로 돌아간다는 지적도 있다. 이창무 한양대 교수는 "임대료 인상을 제한당한 임대사업자, 보유세 인상을 눈앞에 둔 다주택자가 예상되는 비용을 세입자에게 미리 떠넘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성규 한국건설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1~2년간 주택 가격이 급등한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전세 시세가 덜 올랐는데, 시간이 가면서 양쪽 간극이 좁혀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인기 지역 공급 대책이 나오지 않는 한 전세 오름세가 당분간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