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10년동안 정부가 예산 총지출 증가율을 두 자릿수로 편성한 경우는 지난 2009년 예산안이 유일했다. 리먼 브러더스 파산으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해 역(-)성장이 예상될 정도로 경기가 악화된 상황이었다. 정부는 전년대비 10.6% 증액된 2009년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고, 이후 추경 편성을 통해 총지출 증가율을 최종적으로 17.3%까지 끌어올렸다.

28일 국무회의를 통과한 470조5000억원 규모의 2019년 예산안은 총지출 증가율(9.7%)만 놓고보면 글로벌 금융위기 대비용이었던 2009년 예산안에 버금간다.

그러나 경제상황만 놓고 보면 딴 판이다. 정부는 2009년 추경안을 제출할 당시 성장률 전망치를 -1.9%로 제시했다. 반면 정부가 지난 7월 발표한 내년 실질 GDP(국내총생산) 성장률 전망치는 2,8%다. 이번 예산안은 내년 경상성장률(실질성장률+물가상승률)이 4.4%에 이를 것이라는 전망을 토대로 편성됐다.

정부 스스로도 내년 예산안에 대해 "외부쇼크가 있었던 2009년을 제외하면 2000년 이후 총지출 증가율이 최고 수준에 이른다"고 설명한다. 올해(2.9%)와 비슷한 잠재성장률 수준의 성장이 가능지만, 금융위기 등이 일어났을 때 만큼 확장작으로 예산을 편성한 것은 최근 취약계층을 중심으로 고용과 소득이 나빠졌기 때문이라고 정부는 설명한다. 확장적 재정지출을 통해 저소득층의 고용과 소득을 적극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인데, 급격한 최저임금 인상을 포함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부작용을 수습하기 위해 세금 퍼붓기에 나섰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소득주도성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재정정책을 지나치게 확장적으로 운용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특히 한번 도입하면 되돌리기 힘든 복지 보조금 성격의 경직성 예산이 급속히 늘고 있어 최후의 보루인 재정건전성을 해칠 수 있다는 것이다.

◇ "확장적 재정정책을 소득증가 마중물로" 정치권·靑 요구 수용

정부는 당초 내년 예산 총지출 증가율을 5.7% 수준으로 관리할 방침이었다. 문재인 정부 출범 후 처음 편성하는 2018년 예산안 총지출 증가율을 7.1%로 끌어올린 후 내년부터는 지출 증가율을 조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국가재정운용계획 상 총지출 증가율 비교

하지만 이런 구상은 지난 5월 31일 문재인 대통령 주재 국가재정전략회의 이후 대폭 수정된다. 지난 2월 이후 취업자 증가수가 10만명대 안팎으로 쪼그라든 고용참사, 저소득층 소득감소로 인한 소득분배 악화 등이 재정지출을 대폭 늘려 저소득층을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로 이어졌다. 지난 2분기 이후 설비투자와 건설투자, 제조업 생산 등이 일제히 감소흐름으로 돌아선 것도 재정지출 확대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민간의 투자 부진을 재정 투자 확대 등으로 메워야 한다는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예산 편성 막바지에 정부가 ‘동네 체육관’과 각종 문화시설을 짓는 생활SOC 투자, 플랫폼 경제·혁신성장 8대 선도산업 투자 등을 제시한 것은 이런 문제의식에 따른 것이다.

내년 예산 총지출 증가율을 10%에 육박한 9.7%까지 끌어올린 결정타는 정치권과 청와대의 요구였다. 더불어민주당은 일찌감치 정부측에 ‘상상을 초월한 확장적 재정정책’을 주문했다. 홍영표 원내대표는 지난달 국회에서 열린 비공개 의원총회에서 "내년 최대한 두 자릿수 이상의 재정확대를 요구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청와대도 재정확대가 소득증가 마중물이 돼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번 강조했다. 복수의 여권 관계자들에 따르면 청와대는 예산편성 과정에서 기획재정부가 보고한 내년 예산안 초안에 대해 ,총지출 증가율 등이 청와대 구상과 맞지 않다는 이유로 두 차례 이상 퇴짜를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일 "정부는 고용상황이 어려운 분야와 연령대에 대해 더욱 다양하고 강력한 대책들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며 "올해와 내년도 세수전망이 좋은 만큼 정부는 늘어나는 세수를 충분히 활용해 적극적인 재정정책을 펼쳐주길 바란다"고 주문했다.

◇ 김동연 "쉽지 않은 일이었다"…복지예산 비중 해마다 커지는 예산안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내년 예산안을 발표한 지난 24일 사전 브리핑에서 "내년도 예산편성에 있어서 규모를 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더 많이 고민한 부분은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하나라도 더 만들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경제의 역동성을 높일 수 있는 지 등이었다"고 말했다.

내년 예산안은 일자리, 저소득층 소득 보강, 사회안전망 확충 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일자리 예산이 올해보다 22%나 증가한 23조5000억원으로 편성된다. 사상 최대 규모다. 청년, 노인층 위주였던 취업·전직 지원 사업이 신중년(50대~60대)으로 확대되고, 중소기업 취업청년에 대한 자산형성 지원 사업 등도 확대된다.

일자리 예산이 포함된 보건·복지·노동 예산은 전체 예산의 34.5%인 162조2000억원 규모로 편성된다. 이 비율 역시 사상 최대다. 기초·장애인 연금이 인상되고, 실업 급여 지급액과 지급 기간이 확대되는 등 사회보장성이 강화된다. 또 저소득 근로자와 영세 사업주 등 취약계층에 대한 고용보험 등 사회보험료 지원이 확대된다. 소규모 사업자는 국민연금과 고용보험료의 90%를 정부 재정에서 지원받게 된다. 중위소득 120% 이하 구직 청년들에게는 6개월간 월 50만원이 지급되는 청년구직활동지원금 사업도 신설된다.

특히 보건·복지·노동 분야 예산의 경우 내년부터 2022년까지 매년 10% 가량의 증가율이 유지될 계획이다. 2018~2022년 중기재정운용계획의 정부지출 연평균 증가율(7.3%)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노동 분야 예산이 전체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0년 35.4%, 2021년 36.6%, 2022년 37.7%로 매년 늘어나게 된다.

◇ 전문가 "돌이키기 힘든 경직성 예산지출 확대 우려"

전문가들은 이같은 문재인 정부의 재정운용에 대해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만, 재정건전성에 금을 내는 재정지출 비효율성에 대해선 강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특히 정부의 일자리·사회안전망 예산이 상당부분 취약계층에 대한 보조금 지출 성격이어서 한번 도입하면 줄일 수 없는 예산지출의 경직성이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했다. 게다가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인 저출산 고령화도 재정건전성의 최대 위협 요인으로 대두된 상태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연구원장은 "저소득층을 대상으로 한 EITC(근로장려세제) 확대, 기초연금 지급액 인상, 실업급여 확대 등은 사회안전망을 강화한다는 측면에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사업이지만, 모든 걸 한꺼번에 동시다발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면서 "진짜 취약한 계층을 대상으로 도입해 효과를 확인한 후 단계적으로 대상을 확대하는 속도조절이 필요해 보이는데, 재정당국이 확대재정 요구에 무력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정부 고위 관계자도 "취약계층에 대한 보조금 사업이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것은 한번 시작하면 되돌릴 수 없는 경직성 예산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복지전달체계 개선과 지출 구조조정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