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정모(37)씨는 지난달 서울 노원구 중계동 B아파트 전용면적 84㎡를 7억원대 초반에 샀다. 정씨는 신용 대출까지 끌어다 썼다. 그는 "정부가 집값을 잡겠다고 해서 기다린 내가 바보였다"며 "당장 못 사면 영원히 '인(in) 서울'이 불가능할 것 같아 저질렀는데, 이제 와서 보니 내 용기가 대견하다"고 했다. 이 아파트 호가(呼價)는 지금 7억7000만원이다.

강남에서는 지난주 3.3㎡당 1억원 시대가 열렸다. 서초구 반포동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59㎡(24평형)가 24억5000만원에 팔린 것이다. 1월만 해도 18억7000만원이었다. 현지 중개업소 측은 "1억원은 한강이 잘 보이는 일부 가구 가격이지만, 뒷동(棟)도 평당 9000만원에 육박한다"고 말했다.

서울 아파트값이 강남·강북을 가리지 않고 불붙고 있다. '집값을 잡겠다'는 정부 약속을 믿고 기다리던 실수요자들마저 집값 상승세에 겁먹고 뒤늦게 '묻지 마 매수(買收)' 대열에 뛰어든 결과라는 분석이다. 노무현 정부 때 강남 투자를 부추겼던 '강남 불패(不敗)론'이 요즘은 '서울 아파트를 사두면 무조건 돈이 된다'는 '서울 불패론'으로 되살아나면서 지방 수요까지 서울로 대거 몰리고 있다.

"물건도 안 보고 산다"… 불안감이 집값 끌어올려

서울 집값은 전방위 급등세다. 26일 KB국민은행에 따르면 20일 기준 서울의 아파트 매매가는 전주 대비 0.72% 올랐다. 해당 통계 집계를 시작한 2008년 4월 이후 가장 높다. 용산구가 1주일 만에 1.72% 올랐고 영등포구 1.36%, 서초구 1.08%, 구로구 1.05% 등 강남·강북이 따로 없었다. 서울 노원구 중계동 중개업소에는 "매물만 나오면 사겠다"는 대기자 명단까지 생겨났다. 직장인 김모(33)씨는 "원하는 아파트가 매물로 나왔는데, 직접 가볼 시간이 없어 딱 한나절 고민하다가 밤늦게 '일단 가계약금 넣겠다'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미 다른 분이 안 보고 계약했다'는 답장이 오더라"며 "며칠째 속상하다"고 말했다.

박원갑 KB국민은행 전문위원은 "고소득 전문직들마저 '이러다가 좋은 집을 살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포에 휩싸여 집주인이 부르는 대로 돈을 지불한다"고 말했다. 지난달 강남구 삼성동 전용면적 31㎡(14평) 아파트를 8억7000만원에 사들여 1개월 만에 호가 기준 1억3000만원을 벌게 된 대기업 연구원 김모(42)씨는 "기분이 나쁜 건 아닌데, 월급이 허무하다"고 했다.

계약 파기도 속출한다. 마포구에서는 집주인이 13억8000만원에 팔기로 했던 래미안푸르지오 아파트 계약을 깨는 과정에서 가(假)계약금 5000만원을 두 배로 돌려줘야 하느냐 마느냐로 매수인과 싸움이 붙었다.

지방 수요도 몰리고 있다. 서울 이외 지역에 살던 사람이 서울 아파트를 산 비중은 2016년 7월 16.2%에서 올해 7월 18.7%로 올라갔고, 강남구에서는 같은 기간 21.6→25.7%로 급등했다. 서울은 집값이 급등세이지만 올해 지방 시·군 집값은 단 한 주(週)도 빠짐없이 마이너스(-)를 기록 중이다. 경북 안동 미래부동산 권용극(72) 대표는 "경북 집값이 계속 내리면서 돈 좀 있다는 사람들이 전부 서울 아파트를 보러 다니느라 바쁘다"고 말했다.

"정책이 시장과 거꾸로 간다"

상당수 전문가는 "정부 책임이 크다"고 말한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시장에서 가격을 낮추려면 수요를 줄이든가, 공급을 늘리는 게 경제학의 기본"이라며 "그런데 이 정부는 대출 규제로 수요를 일부 줄였지만, 양도세 중과와 임대사업자 등록 유도를 통해 공급을 더 크게 줄였고, 재건축을 압박해 '앞으로도 공급은 계속 없다'는 예고까지 하고 있다"고 말했다. 4월 양도세 중과 이후 매물이 줄어 거래 건수는 3월의 절반 수준으로 감소한 상태다.

부동산 전문가 출신인 김현아 국회의원은 "정부가 재개발·재건축으로 철거한 멸실(滅失) 주택에 대한 정확한 통계도 없이 반쪽짜리 공급 통계만을 근거로 수요만 억누르는 정책을 펴면서 시장이 왜곡되고 있다"고 말했다. 작년 서울 입주 주택 수에서 멸실 주택 수를 뺀 '순증(純增) 주택 수'가 최근 10년 내 최저 수준이고, 특히 재건축·재개발이 활발했던 강남 4구는 멸실된 주택이 2600여 가구 더 많은 '순감(純減) 지역'이라는 것.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신규 택지가 없는 서울에선 재건축·재개발을 풀어주는 게 장기적으로 집값을 잡을 유일한 길이지만, 현 정부는 그런 선택을 극도로 싫어하는 만큼 차선책으로 경기도로 이주하는 서울시민에게 세금 관련 인센티브를 주는 수요 분산책이라도 검토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추가 규제 준비…버블 붕괴 땐 경제 위기 가능성도

정부는 또다시 주택 시장 추가 규제를 발표한다. 현재 서울시내 11개 구인 '투기 지역'을 더 확대한다는 방침이다. 노무현 정부 때에도 투기 지역(당시엔 '지정지역')을 잇달아 확대하는 식으로 집값 상승에 대응했는데, 오히려 집값 상승세를 확산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서울 집값이 마냥 치솟을 것 같은 심리가 시장에 퍼져 있지만 금리 인상, 미·중 무역 전쟁, 인구 고령화 등 집값을 하락시킬 수 있는 잠재 변수도 널려 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실장도 "서울 인기 지역 아파트값은 소득 대비로도 과한 측면이 있다"며 "가격이 지나치게 올랐다가 갑자기 거품이 꺼질 경우 주택 시장을 넘어 국가 경제 전반에 큰 충격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