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재호 총장

40년 전의 일이다. 한국고등교육재단 장학생에 선발되기 위해 면접장에 갔다. 5~6명의 면접 위원 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는데,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이고 공격적으로 질문했다. 최종현 회장이었다.

그 당시엔 큰 부자가 아니면 미국 명문 대학 유학이 불가능했다. 등록금과 생활비가 매년 소형 아파트 한 채를 팔아야 하는 수준이었다. 재단은 하버드·예일·프린스턴·스탠퍼드·버클리 등 5개 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가면 5년간 학비와 생활비 전액을 지원해 준다고 했다. 박사 학위 취득 후 SK에 근무해야 한다는 조건도 없었다. 최 회장은 회삿돈이 아니라 개인 사비로 재단 자금을 댔다.

재단은 매년 10명 정도의 사회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을 선발했다. "이공계 학생을 지원하지 왜 사회과학 전공자들을 지원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답은 예상 밖이었다. 우리 경제가 세계 10위권이 되면 사회가 복잡해질 텐데 그렇게 되면 사회과학을 전공한 뛰어난 학자들이 더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했다.

최종현 회장은 40~50년 후가 되면 SK그룹이 세계 100대 기업이 되고 한국은 세계 10위 권의 경제 대국이 된다고 호언장담했다.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550달러에 불과할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회사 발전이 아니라 나라가 복잡해지고 문제가 많이 생길 것을 걱정하는 기업인이라니 이해가 잘 안 됐다. IMF 외환 위기를 앞두고 산소호흡기로 투병 중에도 청와대를 찾아가 특단의 조치를 건의한 것을 보면서 그의 열정적인 나라 사랑을 이해할 수 있었다.

최종현 회장이 사후에 화장(火葬)을 선택한 것도 평소 우리나라 산천이 무덤으로 뒤덮인다고 걱정하던 것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민둥산이었던 인등산 수백만평에 손수 나무를 심은 것은 산림녹화뿐 아니라 나중에 아름드리나무가 되면 그것으로 인재들을 키우자는 생각이었다.

지난 50년간 세계경제가 7배 정도 성장했는데 우리 경제는 400배 성장했다. 이처럼 기적 같은 일은 나라와 미래를 걱정하고 꿈꾸던 최종현 회장 같은 사회 혁신가가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