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5일 경기 판교 엔씨소프트 본사 8층에 있는 인공지능(AI), 자연어처리(NLP) 센터. 회의실에서는 연구원 5명이 컴퓨터 언어가 빼곡히 쓰인 칠판을 두고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흔히 게임회사에 가면 접할 수 있는 화려한 게임 캐릭터 포스트나 관련 그래픽 작업 모습은 볼 수 없었다. 100여 명에 달하는 연구 인력은 게임과 관련 없는 야구 경기 하이라이트를 보거나, 주고받은 잡담을 녹음한 파일을 컴퓨터가 정확하게 인식하는지 여부를 테스트하고 있었다.

엔씨소프트를 비롯한 넷마블·넥슨 등 국내 게임업계 대표 업체들이 최근 AI 연구 조직을 확대·개편하면서 AI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2011년 AI 연구 조직을 설치한 엔씨소프트는 올해 3월 간담회를 열고 지난 7년간의 연구 성과와 앞으로 계획을 발표했다. 넷마블은 지난 3월 미국 IBM 왓슨 연구소 출신 이준영 박사를 센터장으로 임명하고, AI 연구 조직을 'AI 레볼루션 센터'로 확대했다. 넥슨도 지난해 12월 사내 인공지능 연구팀을 '인텔리전스랩스'로 확대 개편하고, 올해 말까지 200여 명의 연구 인력을 추가 채용한다. 게임업체들이 AI를 차세대 먹거리이자 경쟁력으로 보고 공격적인 투자를 아끼지 않는 것이다.

엔씨 '야구 분석 AI' 내놓아…다양한 AI 서비스 개발

엔씨는 지난달 24일 프로야구 AI 서비스인 '페이지' 앱(응용프로그램)을 출시했다. AI가 경기 통계 데이터를 스스로 분석해 경기를 요약해주거나 그래프로 만들어 한눈에 야구 자료를 볼 수 있도록 돕는다. 좋아하는 구단의 최신 뉴스를 요약해주거나, 관전 포인트도 알려준다. 게임과 전혀 상관없는 AI 서비스를 게임회사가 만들어 출시한 것이다.

엔씨소프트 이재준 AI 센터장이 최근 경기 판교 엔씨소프트 본사에서 간담회를 열고, 개발 중인 AI를 소개하고 있다.

엔씨는 게임과 별개로 야구처럼 여러 분야에 적용할 수 있는 독자적인 AI를 개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타율·평균자책점 등 다양한 숫자와 데이터가 풍성한 야구를 소재로 AI를 만든 이유다. 이재준 AI센터장은 "구글의 딥마인드가 바둑 AI 알파고를 개발할 것도 통제된 환경에서 다양한 변수를 계산하는 데 바둑이 최적화된 환경이었기 때문"이라며 "가상세계라는 통제된 환경을 가진 게임은 AI를 연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이자 환경"이라고 했다. 게임 기업이 AI 연구에 유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구글 딥마인드는 인간과 게임 스타크래프트 대결할 AI를 개발 중이다.

엔씨소프트는 인간의 언어와 지식을 이해하는 AI 연구팀을 따로 운영하고 있다. 장정선 NLP(자연어처리) 센터장은 "게임 이용자의 말과 채팅을 이해하는 AI를 개발하고 있다"며 "이 기술이 발전하면 예컨대 이용자의 목소리로 조종하는 게임, 이용자의 반응에 따라 다양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게임 개발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김택진 대표는 AI 개발 회의와 세미나에 직접 참석해 의견을 제시할 정도로 AI 연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넷마블, 게임 운영 돕는 AI…넥슨은 게임 내 AI 탑재

넷마블의 AI 연구 조직인 'AI 레볼루션 센터'는 '콜롬버스'라는 이름의 AI 프로젝트를 연구 중이다. 콜롬버스는 컴퓨터가 스스로 빅데이터를 분석해 게임 운영과 마케팅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AI다. 이용자의 게임 이용 성향을 AI가 분석해 맞춤형 아이템을 추천하거나, 마케팅 이벤트를 이용자별로 차별화해 제시하는 방식이다.

지난 14일 넷마블 AI 레볼루션 센터에서 이 회사 직원들이 함께 회의하고 있는 모습. 넷마블은 콜롬버스라는 이름의 AI 프로젝트를 연구하고 있다.

또 개발하고 있는 '마젤란'이란 AI는 이용자의 게임 이용 수준에 따라 게임 난이도를 조정할 수 있다. 맞춤형 게임을 제시하는 기술인 셈이다. 예컨대 초등학교 2학년에겐 게임을 더 쉽게, 성인에겐 더 어렵게 난이도를 컴퓨터가 스스로 조율하는 것이다,

넥슨이 지난 1월 내놓은 모바일 게임 '야생의 땅:듀랑고'는 게임에 AI를 적용했다. AI가 스스로 게임의 가상세계를 무작위로 생성하면서 이용자가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넓혀준다. 다른 게임에선 개발자가 직접 만들어야 하는 가상세계를 컴퓨터 스스로 넓히면서 개발 작업을 돕는 것이다. 게임에 등장하는 공룡과 맹수들에게도 AI가 적용됐다. 이용자의 행동과 가상세계의 지형에 따라 다르게 반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