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보험료를 내는 상한 연령이 60세에서 65세로 연장되고, 연금을 받기 시작하는 나이도 62세에서 68세로 늦춰질 수 있다는 우려가 퍼지면서 비난 여론이 거세지고 있다. 정부가 “현재 제시된 안들은 정책자문일 뿐 정부 확정안이 아니다”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이미 들끓기 시작한 불만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는 모양새다.

특히 여론을 의식한 정부의 발빠른 ‘선긋기’에 1년간 국민연금 재정계산에 참여해온 민간 전문가들마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계에서는 정부가 국민연금만 물고 늘어지지 말고 연금 개혁에 대한 종합적인 그림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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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론 악화되자 정부 선긋기…민간위원들 ‘당혹’

13일 정부·학계 등에 따르면 제4차 국민연금 재정추계위원회(이하 재정추계위)에 참여 중인 민간인 전문가들은 최근 언론을 통해 공개된 위원회 논의 결과에 대한 사람들의 분노에 크게 당황하고 있다. 재정계산은 국민연금의 장기 재정수지를 계산해 국민연금제도 운영 전반에 관한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이다. 국민연금법에 따라 2003년부터 5년 단위로 실시된다.

재정추계위 활동을 하고 있는 전문가 A씨는 “2057년으로 예상되는 국민연금 고갈 시기를 늦추기 위한 방안을 학술적으로 검토한 것뿐인데 인터넷 댓글 등의 반응을 보면 마치 우리가 서민의 고혈을 짜내려는 집단에 협조하는 사람들인 것 같다”고 푸념했다. 재정추계위에는 재정학·보험수리학 등 학계와 정부·노동계 등을 대표하는 전문가 수십명이 참여하고 있다.

4차 재정추계위는 지난해 8월부터 1년간의 연구 과정을 거쳐 소득대체율(생애평균소득 대비 연금액)을 현 수준(45%)으로 유지하는 대신 월소득의 9%인 현행 보험료율을 내년에 10.8%로 올리는 방안, 소득대체율을 40%까지 낮추고 보험료율을 단계적으로 13%까지 올리는 방안, 보험료 의무납입 연령을 60세 미만에서 65세 미만까지 연장하는 방안, 연금 수급 연령을 만 65세(2033년)에서 2048년까지 68세로 늦추는 방안 등을 마련했다.

기금 소진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으나 방안들이 공개된 후 여론은 급격히 악화됐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국민연금 제도를 수정 또는 폐지하라는 내용의 불만글이 며칠 사이 1000개 이상 등록됐다. 한 청원인은 “불볕더위에 에어컨을 켤 수 없는 서민이 상당수인데 최후의 보루인 국민연금마저 정부가 손대려고 한다”며 “50대인 지금도 힘든데 연금 수급 나이를 늦추면 60대에는 어떻게 견디라는 말인가”라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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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추계위 위원 B씨는 “국민연금 자체가 워낙 민감한 이슈인 만큼 당혹스럽긴 하지만 불만 여론을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라며 “그런데 정부가 우리(재정추계위)를 앞세워 여론 눈치를 본 후 분위기가 나빠지자 ‘정부 입장이 아니다’라고 한 발 물러난 건 솔직히 불쾌하다”고 말했다.

보건복지부는 일요일인 지난 12일 박능후 장관 명의로 입장문을 냈다. 박 장관은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민연금 보험료 인상, 가입연령 상향조정, 수급개시 연장 등은 민간위원 중심으로 구성된 재정추계위에서 논의되고 있는 사항의 일부일 뿐 정부안으로 확정된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박 장관의 해명에도 부정적인 여론이 사그라들지 않자 문재인 대통령도 사태 진화에 나섰다. 문 대통령은 13일 “국민 동의와 사회적 합의가 없는 정부의 일방적인 국민연금 개편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재정추계위원 B씨는 “자문안이 곧바로 정부정책안이 되는 게 아닌 건 맞지만, 현재 위원회에는 국민연금연구원 등 정부 관계자들도 참여하고 있다”며 “정부 기조를 고려해 함께 논의한 내용을 마치 민간위원들이 마음대로 정한 것처럼 만들어 총알받이로 내몰면 일할 의욕이 사라진다”고 토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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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평한 연금개혁안 제시해야 국민 납득”

한국의 저출산·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현재의 국민연금 제도가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건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또 보다 건전한 기금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언젠가는 제도 개선이 불가피하다는 점도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하는 사실이다.

하지만 정부가 국민 노후에 대한 종합적인 청사진을 제시하고 이를 위해 각계 각층이 어떤 공평한 노력과 희생을 기울여야 하는지는 설명하지도 못하면서 국민연금 하나만 물고 늘어지는 건 국민 다수의 동의를 얻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기도 하다.

이한상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정부가 사학연금·공무원연금·군인연금 등 국고로 지원하는 특수직역연금은 그대로 놔두고 서민 노후자금만 건드리려고 하는데 일반 국민이라고 성깔이 없겠는가”라며 “현 정부가 지향하는 복지국가의 미래가 무엇이고, 이를 위해 우리가 언제 어떻게 받고 나눠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공평한 로드맵부터 내놓아야 국민적 지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제도 개선에 앞서 망가질대로 망가진 국민연금의 기금운용 역량부터 정상화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 자리는 강면욱 전 CIO가 지난해 7월 돌연 사표를 낸 후 1년 넘게 비어있다. 올해 5월 말 기준 국민연금의 국내 주식 수익률은 -1.19%로, 같은 기간 국내 주식시장의 평균 수익률인 -0.26%보다도 저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민간자산운용사 고위 관계자는 “국민연금 기금운용 시스템에 대한 업계 우려가 가뜩이나 큰 상황인데 최근에는 자산운용 경력이 전무한 전직 증권사 CEO가 국민연금 CIO 유력후보로 급부상했다는 보도까지 잇달아 나와 걱정이 더 커졌다”며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 붕괴의 심각성을 정부가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