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대표 기업들의 수익 창출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다. 12일 KB증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 기업 중 145곳(8월 9일 현재 기준)이 올해 2분기(4~6월) 실적을 발표했다. 대부분 시가총액 비중이 큰 대기업들이다. 그런데 시장 기대치보다 영업이익이 10% 이상 낮아 '어닝 쇼크'를 기록한 기업이 43곳(29.7%)에 달했다. 부진한 업종에는 IT, 자동차, 통신, 조선 등 국내 주력 산업이 죄다 포함돼 있다. 반면 기대 이상 실적을 거둔 기업은 30곳에 머물렀다. 금융 정보 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상장 기업 가운데 실적을 발표한 기업 155곳을 조사한 결과도 비슷했다. 155곳 중 영업이익이 시장 기대치보다 10% 이상 적은 기업이 58개사(37.4%)에 달했고, 조사 대상 기업 중 절반 이상의 영업이익이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다.

기업이 돈을 벌어야 근로자와 주주들의 지갑이 두둑해지고, 내수(內需)와 세수(稅收)가 좋아진다. 기업 실적 둔화는 한국 경제의 미래가 어두워진다는 전망을 뒷받침하는 나쁜 전조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최근 "6월 한국의 경기선행지수가 전달보다 0.3포인트 내려간 99.2를 기록해 15개월 연속 하락 중"이라고 발표했다. 이 지수가 100 아래면 경기가 하락하고 있다는 뜻이다. OECD가 우리나라의 경기선행지수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락세로 집계한 것은 1999년 외환 위기 이후(1999년 9월~2001년 4월) 처음이다. 김광두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은 지난 6월 초부터 "우리 경제가 이미 침체의 초입 국면이다. 기업 투자가 위축되고 기업가 정신이 쇠퇴하는 상황을 방치해선 안 된다"고 경고했는데, 이 말이 현실화되고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 대표 기업들의 수익력 저하는 전방위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간판 기업, 삼성전자의 스마트폰 판매량은 2분기 중 동유럽을 제외한 세계 모든 지역에서 추락했다. 시장조사 업체 스트래티지 애널리틱스(SA)가 최근 내놓은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 2분기 북미 지역 판매량이 2012년 3분기 이후 가장 적은 900만대에 그쳤다. 전년 동기 대비 판매에 비해 440만대 줄었다.

북미와 마찬가지로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으로 분류되는 서유럽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2분기 중 삼성전자는 980만대를 판매해 2012년 1분기부터 25분기 연속 이어져 온 1000만대 이상 판매 기록이 끊겼다.

중저가 스마트폰 시장으로 분류되는 아시아, 중남미,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삼성전자 휴대폰 판매량은 일제히 하락하고 있다. 2분기 아시아에서는 2180만대를 판매해 전년 동기 대비 130만대 줄었고 중남미에서는 20만대 감소한 1400만대를 팔았다. 중동·아프리카 지역에서는 2014년 2분기 이후 최저치인 1060만대 판매에 그쳤다. 판매량이 유일하게 증가한 곳은 동유럽이었다. 전년 동기 대비 10만대 증가한 630만대를 기록했다. 하지만 SA는 "러시아월드컵 기간에 맞춰 삼성전자가 동유럽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마케팅을 펼친 결과"라고 평가절하했다.

이미 중국에 1위 자리를 빼앗긴 디스플레이 업종의 추락은 더 극적이다. LG디스플레이는 2분기 2281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삼성디스플레이의 2분기 매출은 사상 처음으로 5조원대로 주저앉았다. 11조원을 넘겼던 작년 4분기 이후 불과 반년 만에 반 토막이 났다. 저가를 앞세운 중국 업체들의 공세에 속절없이 시장을 뺏기고 있는 상황이다.

◇"호(好)시절 끝났다" 경고음

2분기 기업 실적은 IT는 물론 다른 분야에서도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삼성전자와 더불어 대한민국 대표 기업으로 불리는 현대자동차가 실적 부진 늪에 빠져 있다. 올해 1분기 작년 같은 기간보다 영업이익이 45.5% 줄었던 현대차는 2분기엔 다소 개선됐지만, 이 역시 작년보다 29.3% 감소한 것이다. 대표적 수출 업종인 조선 업종의 추락도 계속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은 올해 2분기 1757억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삼성중공업도 2분기 1005억원의 영업 손실을 냈다. 해외여행 폭증세에도 불구하고, 항공업계마저 고유가 직격탄을 맞아 실적 부진에 시달리고 있다. 제주항공과 진에어의 2분기 영업이익이 작년에 대폭 감소했고, 실적 발표를 앞둔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도 지난해보다 영업이익이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대표적 내수 업종인 통신 기업은 정부의 통신료 인하 정책 직격탄을 맞았다. SK텔레콤·KT·LG유플러스 등 통신 3사의 2분기 영업이익 합계는 1조원을 넘겼던 지난해에 비해 9.4% 줄어든 9777억원에 머물렀다. 정부의 통신비 인하 정책으로 1년 사이 SK텔레콤은 16.7%, KT는 15.7%의 영업이익이 쪼그라들었다.

유일한 보루인 반도체조차 정점을 지났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미국계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지난 9일 반도체 업종에 대한 투자 의견을 '최하'로 조정했다. 이 여파로 지난 주말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주가는 전일 대비 3% 넘게 급락했다. 김윤서 신한금융투자 연구원은 "증권업계에선 2분기 실적 발표 후 은행·반도체·운송·건설을 뺀 전(全) 업종의 이익 전망치를 하향 조정 중"이라고 말했다.

◇경기 둔화 대처할 골든타임 놓치고 있다

기업 실적 부진에 따른 위기감은 이미 경기를 전망하는 경제지표에 속속 반영되고 있다. OECD가 최근 15개월 연속 우리나라의 경기선행지수를 하향 조정한 것이 대표적이다. OECD는 각국의 제조업 재고 상황, 금리, 수출입 물가 비율, 제조업 경기 전망, 자본재 재고지수, 주가 등 6개 지표를 활용해 이를 산출하는데 이 수치가 15개월 내리 하락 중인 나라는 OECD 회원국 가운데 사실상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OECD뿐 아니라 한국은행, 한국경제연구원 등이 산출하는 경기전망지수도 같은 흐름이다. 지난달 말 한은이 발표한 7월 기업경기 실사지수(BSI)는 75로, 17개월 만에 가장 낮은 수준이다. 학계에서도 6~7월을 기점으로 경기가 하향 국면에 접어들었다는 시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도 기획재정부는 매달 발표하는 경제 동향(그린북)에서 9개월 연속 '경기 회복세'라는 판단을 고수하고 있다. 정부가 안이한 경기 인식을 고수하면서 자칫 경기 하락 충격에 대처할 시기마저 놓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국책연구원장은 "정부가 안이한 인식을 고집하면서 최저임금 인상이나 주 52시간 근무제 등 단기적으로 기업 부담을 늘리는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며 "경기 침체로 충격이 오는 사태가 없도록 정부가 어느 때보다 긴장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