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 폐암수술을 받은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산소호흡기를 달고 청와대를 찾았다. 최 회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영삼 대통령에게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 경제가 큰일 난다"며 금리 인하 등 특단의 조치를 건의했다. 그는 그다음 달에도 대통령을 만났지만, 돌아온 대답은 "알아보겠다"뿐이었다. 한 달 뒤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최 회장은 다음해 8월 세상을 떠났다.
오는 26일 20주기를 맞는 고(故) 최종현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고인은 먹고살기 어려운 1970년대부터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사업과 인재에 과감하게 투자했다"며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서 패러다임 시프트를 만들어 낸 '경영 구루(guru·스승)'이기로 하다"고 말했다.
◇최종현 20주기, 꿈이 현실로
1973년 형인 최종건 SK(당시 선경) 창업주가 갑자기 별세한 후 회장에 취임한 최종현 회장은 세계 일류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직물회사에 불과한 SK를 원유 정제에서부터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최 회장은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에는 해외 유전 개발에 나섰다. 주변에서는 "성공 확률이 5%에 불과한 도박"이라며 만류했지만 밀어붙였다.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무자원 산유국'이 됐다. 1991년에는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최 회장은 그룹 총수의 역할은 미래 설계라고 했다.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은 최 회장은 미국 ICT (정보통신기술)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 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원에 인수했다.
최 회장은 또 미래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세웠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다. 아들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직후,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이 실현됐다"고 말했다.
◇장례 문화 바꾼 재계 리더
최 회장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 되던 1970년대부터 인재 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웠다. 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에 달하는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다.
그는 국내 장례 문화도 바꿨다. 최 회장은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 회장 사후 한 달 만에 '한국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가 결성돼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펼쳐졌고, 20%에 불과했던 화장률이 이듬해 30%를 넘기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화장률은 82%에 달한다.
SK그룹은 오는 24일 서울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최 회장의 경영 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또 그룹 임직원들의 기부금을 모아 숲 조성 사회적기업인 트리플래닛에 전달, 5만 평 규모의 숲을 조성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