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0월, 폐암수술을 받은 최종현 SK그룹 회장이 산소호흡기를 달고 청와대를 찾았다. 최 회장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김영삼 대통령에게 "비상조치를 늦추면 나라 경제가 큰일 난다"며 금리 인하 등 특단의 조치를 건의했다. 그는 그다음 달에도 대통령을 만났지만, 돌아온 대답은 "알아보겠다"뿐이었다. 한 달 뒤 우리나라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했다. 최 회장은 다음해 8월 세상을 떠났다.

오는 26일 20주기를 맞는 고(故) 최종현 회장의 경영 리더십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염재호 고려대 총장은 "고인은 먹고살기 어려운 1970년대부터 20~30년 앞을 내다보고 새로운 사업과 인재에 과감하게 투자했다"며 "단순히 돈을 버는 것에서 패러다임 시프트를 만들어 낸 '경영 구루(guru·스승)'이기로 하다"고 말했다.

최종현 20주기, 꿈이 현실로

1973년 형인 최종건 SK(당시 선경) 창업주가 갑자기 별세한 후 회장에 취임한 최종현 회장은 세계 일류의 에너지·화학 회사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밝혔다. 직물회사에 불과한 SK를 원유 정제에서부터 석유화학, 필름, 원사, 섬유 등에 이르는 수직계열화를 선언했다. 당시 재계에서는 "꿈 같은 이야기"라고 말했다.

1997년 9월 폐암수술을 받은 최종현(사진 가운데) SK그룹 회장이 산소호흡기를 꽂은 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경제위기 극복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사진 왼쪽은 김우중 당시 대우그룹 회장, 오른쪽은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이다. 최 회장은 이로부터 1년 뒤인 1998년 8월 26일 별세했다.

최 회장은 장기적 안목과 중동지역 왕실과의 석유 네트워크 구축 등 치밀한 준비 끝에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했다. 1983년에는 해외 유전 개발에 나섰다. 주변에서는 "성공 확률이 5%에 불과한 도박"이라며 만류했지만 밀어붙였다. 이듬해인 1984년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했다. 덕분에 우리나라는 '무자원 산유국'이 됐다. 1991년에는 울산에 합성섬유 원료인 파라자일렌(PX) 제조시설을 준공함으로써 수직계열화를 완성했다.

최 회장은 그룹 총수의 역할은 미래 설계라고 했다. 정보통신 분야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삼은 최 회장은 미국 ICT (정보통신기술) 기업들에 투자하고 현지 법인을 설립해 이동통신사업을 준비했다. 1994년 한국이동통신(현 SK텔레콤)을 4271억원에 인수했다.

최 회장은 또 미래산업의 중심이 반도체가 될 것임을 예견하고 1978년 선경반도체를 세웠으나, 전 세계를 강타한 2차 오일쇼크로 꿈을 접어야 했다. 아들 최태원 회장은 2011년 하이닉스 인수 직후, "SK의 반도체 사업에 대한 오랜 꿈이 실현됐다"고 말했다.

장례 문화 바꾼 재계 리더

최 회장은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500달러도 안 되던 1970년대부터 인재 양성에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1974년 사재를 털어 한국고등교육재단을 세웠다. 3700명의 장학생을 지원했고 740명에 달하는 해외 명문대 박사를 배출했다.

그는 국내 장례 문화도 바꿨다. 최 회장은 "내가 죽으면 반드시 화장(火葬)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최 회장 사후 한 달 만에 '한국장묘문화개혁 범국민협의회'가 결성돼 '화장 유언 남기기 운동'이 펼쳐졌고, 20%에 불과했던 화장률이 이듬해 30%를 넘기는 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금 화장률은 82%에 달한다.

SK그룹은 오는 24일 서울 워커힐호텔 비스타홀에서 최 회장의 경영 철학을 재조명하는 행사를 가질 예정이다. 또 그룹 임직원들의 기부금을 모아 숲 조성 사회적기업인 트리플래닛에 전달, 5만 평 규모의 숲을 조성키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