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반도체 가격 하락세…“반도체 호황 정점 찍었다” 분석 잇따라

지난 5년간 지속된 ‘수퍼 호황’을 바탕으로 우리 경제를 떠받치던 반도체 업종에 최근 불안한 흐름이 포착되고 있다. 올들어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는 가운데 반도체 업종의 설비투자도 크게 꺾이는 모습이다. 증권가에서는 반도체 업황이 올해 정점을 찍고 내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삼성전자(005930)SK하이닉스(000660)실적이 악화될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반도체는 한국 경제 성장을 나홀로 이끌어 왔다. 지난해 한국 경제가 3.1% 성장할 때 반도체 업종의 기여도는 0.4%포인트에 달했다. 반도체 업종 하나가 한국 수출의 20%, 설비투자의 20%, 전체 기업 영업이익의 25%를 차지했다. 한국 경제 성장을 주도하던 반도체가 호황 국면을 벗어나면 하반기 한국 경제의 하방 위험도 커질 것으로 우려된다. 반도체 업종에만 의존해 불안한 성장을 이어오던 한국 경제의 민낯이 드러나는 셈이다.

◇ 모건스탠리 반도체 업종 투자의견 가장 낮은 ‘주의’

전문가들은 최근 한국의 주력 메모리 반도체인 D램과 낸드플래시의 가격이 떨어지는 추세에 주목하고 있다. 공급 과잉이든 수요 부족이든 가격 하락은 업황이 그만큼 안좋아진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반도체 전문 시장 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최근 DDR4 8Gb(기가비트) D램의 현물(現物) 가격은 올 초 개당 9.6달러에서 최근 7.9달러로 18% 하락했다. 낸드플래시(64Gb 제품 기준) 가격 역시 같은 기간 4달러 수준에서 3달러 대로 내렸다.

반도체 가격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지난 5년간 이어진 반도체 수퍼 호황이 정점을 찍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이에 따라 반도체 업종에 의존한 한국 경제의 하방 위험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라인에서 직원이 제품을 점검하고 있다.

반도체 가격 하락은 당장 삼성전자, SK하이닉스 같은 국내 대표 반도체 기업의 실적 악화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해외 증권사들은 이들 기업의 실적 악화에 대해 경고음을 울리고 있다. 미국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삼성전자 반도체 부문의 영업이익이 올해 48조9400억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한 뒤 내년 45조3700억원, 2020년 43조8600억원으로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JP모건은 올해 SK하이닉스 영업이익이 20조5030억원으로 정점을 찍고 내년 11조6600억원으로 반 토막 날 것이라고 예측했다.

모건스탠리는 반도체 업종에 대한 투자 의견을 가장 낮은 ‘주의(cautious)’로 낮췄다. 조셉 무어 모건스탠리 애널리스트는 지난 9일 “유통상들이 보유한 반도체 재고 물량이 10년 만에 최고 수준”이라며 “제품 주문에서 인도까지 걸리는 시간(리드 타임)이 짧아지거나, 수요가 줄면 가동률과 제품 가격이 떨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모건스탠리 보고서가 발표된 이후 10일 국내 유가증권시장에서 삼성전자와 하이닉스의 주가는 모두 3% 넘게 하락했다.

반도체 호황이 올해 정점을 찍고 내리막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우려는 설비투자 지표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지난해 우리 경제 성장률이 3.1%를 기록한 데는 반도체 업종을 중심으로 한 설비투자가 14.6% 증가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올해 들어 반도체 업종의 설비투자가 위축되면서 전산업 설비투자도 감소세로 돌아섰다. 설비투자는 지난 3월부터 6월까지 4개월 연속 줄었다. 설비투자가 4개월 연속 감소한 것은 2000년 9~12월 이후 17년6개월만에 처음이다. 골드만삭스는 “2분기 설비투자와 건설투자가 감소하면서 한국 내수가 2014년 4분기 이후 처음으로 0.7% 감소했다”며 “2분기 성장세는 예상과 부합하는 수준이지만 앞으로 투자 부진 리스크에 유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반도체 생산에 사용되는 특수산업용기계 설비투자는 2016년 8월부터 올해 초까지 매월 두 자릿수 이상의 높은 증가세(전년 동월 대비)를 보였다. 특히 지난해 5월에는 설비투자가 110.6% 증가했다.

하지만 이때 정점을 찍은 뒤 6월 99.3%, 7월 68.9%, 8월 26.3%로 증가율이 둔화됐고 올해 3월(-0.4%)에는 감소세로 돌아섰다. 4월 7.5% 잠깐 증가세를 보였지만 5월 -14.5%, 6월 -30.4%로 감소세가 확연해졌다. 특히 6월 감소폭은 2013년 2월(-42.8%) 이후 5년 4개월 만에 가장 컸다.

◇ 반도체 호황 마무리되면 수출에 악영향…“거시경제 하방 위험”

지금까지는 반도체를 중심으로 양호한 수출 증가세가 이어지고 있지만, 앞으로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수출도 흔들릴 수 있다는 진단도 나온다. 씨티는 “미중 무역갈등에 따른 불확실성으로 중국 내 데이터센터 확대가 지연되고 있고, 올해 상반기 중국 내 반도체 재고가 축적됐다”며 “반도체 수출의 하방 리스크가 확대됐다”고 평가했다.

반도체 가격 하락세가 이어지면 수출 성적도 악화될 전망이다. 수출 단가 하락에 따라 수출 가격과 물량을 모두 고려한 명목 상품수출 증가율이 낮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은 내년 물량 기준(실질) 상품수출이 3.5% 증가하겠지만, 명목 상품수출은 1.5% 늘어나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주력 수출품인 반도체 가격이 하락하면서 교역조건(수출 한 단위로 살 수 있는 수입량)이 악화되고, 내년 명목 수출 증가율이 물량 기준 수출 증가율을 밑돌 것으로 예상한 것이다. 반도체 호황이 이어지고 있는 올해는 명목 수출이 5.6% 증가해 물량 기준 수출 증가율(3.5%)보다 높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에도 명목 수출증가율은 15.8%로 물량 기준 수출증가율(3.8%)을 크게 웃돌았다.

문제는 명목 수출 증가세가 꺾이면 명목 GDP 성장률도 둔화될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가격 하락에 따라 교역조건이 악화되면 종합물가지표인 GDP디플레이터 상승률이 둔화되고, 실질 GDP 증가율에 GDP디플레이터를 더한 명목 GDP 증가세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한은 금통위원은 지난달 금통위 정례회의에서 “교역조건 악화로 명목 GDP 성장률이 과거에 비해 낮아지면 기업의 매출증가율, 정부의 세수증가율이 둔화되고 경상수지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쳐 앞으로 거시경제에 하방 위험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

올해 하반기부터 한국 경제 상황이 악화될 것이라는 경고도 나온다. OECD(경제협력개발기구)가 추정하는 6월 한국 경기선행지수(CLI)는 15개월 연속 하락하며 2012년 11월 이후 5년 7개월만 최저치로 떨어졌다. 한국 CLI가 15개월 연속 떨어진 것은 IMF(국제통화기금) 외환위기 시절인 1999년 9월~2001년 4월 20개월 연속 하락한 이후 처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