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전기 소비의 13%에 불과한 주택용 전기료에만 누진제를 유지해, 전력 대란을 피하겠다는 정부의 판단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

정부가 '폭염 전기료 대책'을 내놨지만 인터넷에선 "전기 쓸 만큼 쓰고, 쓴 만큼 돈 내겠다는데 왜 누진제는 폐지하지 않느냐"는 불만이 좀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지난 9일 청와대에서도 '전기료 대책의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자성론이 나왔다.

에너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전기 절약의 부담을 주택용에만 전가하는 누진제를 폐지하자'는 주장이 많다. 중국·일본·미국·캐나다 등 외국에서도 주택용 전기료에 누진제를 적용하지만, 누진율 격차는 1.5배 안팎에 불과하다. 우리나라처럼 누진율 격차가 3배에 달하는 '징벌적 요금제'를 채택한 나라는 거의 찾기 힘들다.

◇누진제 폐지… '탈원전'을 겨누는 아킬레스건

주택용 전기료에만 적용되는 누진제에 대한 폐지 여론이 높지만, 정부는 지난 7일 폭염 전기료 대책 발표 때 누진제 개편에 대해 결론을 못 내리고 중·장기 검토 과제로 돌렸다. 백운규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누진제 등 전기 요금 체계 전반에 대한 근본적 제도 개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산업부 내에선 누진제 폐지에 반대하는 의견이 많다. 산업부 관계자는 "누진제를 없애면 전기를 적게 쓰는 저소득층은 오히려 요금이 올라가기 때문에 사회적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가 '탈원전'을 버리면 누진제 폐지도 용이해진다는 분석도 나온다. 값싼 원료인 원자력발전소 가동을 늘리면 누진제를 없애도 저렴한 비용으로 전력 공급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전직 산업부 고위 관리는 "문재인 정부는 '탈원전을 해도 전기가 남아돌고, 전기료도 안 오른다'고 공언해왔다"며 "누진제 폐지 후에도 전기료를 올리지 않으려면 현실적 대안은 원전밖에 없다는 걸 지금 정부 사람들도 잘 알 것"이라고 했다.

◇"시대 변화 맞춰 근본 검토해야"

전문가들도 누진제 폐지 필요성에 무게를 둔다. 44년 전엔 산업화를 위해 가정에 전기 절약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시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한때 사치품이던 에어컨도 이젠 필수품이 됐다. 2000년 29%였던 에어컨 보급률은 현재 87%에 이른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교수는 "전기 절약과 소득 재분배 때문에 누진제를 도입했는데, 이미 우리나라 주택용 전기 사용량은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하다"며 "국민들은 충분히 절약하고 있는데 주택용에만 징벌적 요금을 매기는 건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누진제 폐지에 앞서 충분한 사회적 협의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있다. 인천대 손양훈 교수는 "누진제를 없애면 대다수 소비자의 전기료는 올라갈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누진제 유지와 폐지에 따른 비용 분석 등을 투명하게 공개해서 사회적 합의를 구해야 한다"고 했다.

사회적 합의 도출을 위해 한전이 전기료 원가(原價)를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전은 공기업임에도 "경영상 비밀"이라며 주택용·산업용 등 용도별 원가 공개를 거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정용 전기료를 걷어서 산업체 전기료를 싸게 한다'는 등의 의심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역대 정부도 누진제 놓고 골머리

1974년 도입된 누진제는 역대 정부에서도 '뜨거운 감자'였다. 폭염이 닥칠 때마다 누진제 폐지 여론이 빗발쳤다. 하지만 없애자니 전기 소비 증가로 인한 전력 대란이 우려됐다. 그때마다 '한시적 전기료 인하'나 '땜질식 개편'으로 넘어갔다. 전력 수요·국제 에너지 가격·날씨 등은 물론 정부가 처한 정치적 상황에 따라 누진 단계와 누진율은 롤러코스터 타듯 변동을 겪었다. 보수·진보 정당들도 집권 당시엔 '누진제를 유지하자'고 하다, 야당이 되면 '누진제 폐지'를 주장하는 등 오락가락했다. 더불어민주당은 2013년 당시 정부가 누진제를 개편하려 하자 "부자 감세용"이라며 반대했다가 2016년 8월엔 "누진제는 손봐야 한다"고 했다. 자유한국당 역시 야당 시절엔 누진제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막상 이명박 정부는 누진제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말 전기료 개편 당정 TF(태스크포스)를 구성, 누진제를 기존 6단계에서 3단계로 줄이고, 누진율 격차를 최고 11.7배에서 3배로 완화했다. 당초엔 누진제 폐지까지 검토했지만, 끝내 없애진 못했다. 당시 결정으로 한전의 수익은 연(年) 5000억원 정도 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