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투자, 소비, 수출이 모두 부진해 한국 경제가 '트리플 악재(惡材)'의 늪에 빠져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돈에 민감한 부자(富者) 중에서도 한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는 비중이 올 들어 크게 증가했다. 부자들은 불황에 따른 국내 기업의 실적 악화를 우려해 금융자산 중 주식 투자 비중을 낮추고, 현금과 예·적금 비중을 높이는 등 안정적인 수익을 추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부자도 체감하는 불황

6일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이하 KB연구소)에 따르면 올해 4~5월 전국의 금융자산 10억원 이상인 사람 4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한국 경제가 장기 불황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비중은 60.5%에 달했다. 작년 조사 때(43.7%)보다 17%포인트 증가한 것이다. 향후 경기 상황을 고려해 소비를 줄일 것이라고 응답한 비중은 63.6%로 작년(43.6%)보다 20%포인트 늘었다. 새로운 투자보다 위기에 대비해 현금 유동성 확보를 더 중요하게 보는 비중은 전체의 69.2%로 작년(65%)보다 4.2%포인트 증가했다.

부자들은 우리나라의 장기 성장 가능성도 어둡게 보고 있었다. 설문조사에서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나만큼 잘살기 힘들 것'이라고 답한 비중은 62.3%로 작년(58.1%)보다 4.2%포인트 늘었다. KB연구소 김예구 선임연구위원은 "지난해 글로벌 경제 회복세와 국내 경제 성장세에도 부자들의 불황에 대한 우려감은 계속 커지는 추세"라고 말했다.

◇주식보다 현금·예적금 선호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다 보니 부자들의 투자 성향도 점점 더 보수화되고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부자들의 금융자산 포트폴리오 중 주식 비중은 올해 11.8%로 작년(20.4%)보다 8.6%포인트 줄었다. 반면 현금과 예·적금 비율은 51%로 작년(48.9%)보다 증가했다. 채권·신탁이나 투자·저축성보험 비중도 소폭 증가했다. 공격적 투자로 돈을 벌기보다는 잃을 가능성을 높게 보고, 돈을 지키는 데 주력한 것으로 보인다. 부자들은 소수 투자자로부터 비공개로 돈을 모아 주식, 채권 등 다양한 자산에 투자하는 사모(私募)펀드를 통해 낮은 수익률을 만회하려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사모펀드 투자 의향 비율이 38.5%로 작년보다 22%포인트나 상승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지속된 부동산 규제 정책에도 부자들이 가장 유망하다고 보는 투자처는 여전히 '국내 부동산'(29%)이었다. 작년 말 기준 부자들의 총자산 구성비를 보면, 부동산이 53.3%로 금융자산(42.3%)보다 10%포인트 이상 높았다. 상속 및 증여에 대해서는 일찌감치 사전증여를 고려하는 경우가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 부자 가운데 자산을 전부 사전증여하겠다는 응답은 작년 5.4%에서 올해 16.5%로 3배 넘게 늘었다. 문재인 정부의 부자 증세 기조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보인다.

한편 KB연구소가 한국은행과 통계청, 국세청의 개인 소득 및 가구별 자산 등의 자료와 국민은행 개인별 예치자산 분포 등을 이용해 금융자산을 10억원 이상 가진 부자를 추정한 결과, 작년 말 기준 27만800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24만2000명)보다 15.2% 늘어난 것이다. 한국 부자들의 총 금융자산은 646조원인 것으로 추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