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이하 기금운용위)가 오는 30일 오전 7시 30분 서울 더플라자호텔에서 ‘연금사회주의’ 논란에 휩싸인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 지침) 도입 안건을 논의 테이블에 다시 올린다. 지난 26일 노동계와 시민단체 추천 위원들이 정부가 마련한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안에서 이사 선임·감사 추천 등 ‘경영 참여’에 해당하는 주주활동 내용이 빠졌다며 거세게 반발해 합의점을 찾지 못한 데 따른 것이다.

정부 안팎에서는 이번 기금운용위에서 정부의 원안대로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할 것으로 보고 있다. 기금운용위 위원 20명 중 대다수가 원안대로 7월 중 도입하자는 정부 입장에 동의하고 있고 표대결로 가더라도 노동계 추천위원 3명과 시민단체(참여연대) 추천위원 1명 등 4명을 제외하고 찬성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기금운용위 표결 요건은 ‘과반수 참석-이중 과반수 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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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일 표대결로 정부 도입안 통과할 듯

한 기금운용위 관계자는 29일 “위원들 사이에 ‘2차 회의때는 반드시 의결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며 “위원들 주장이 일치하는 상황이 아닌 만큼 결국 표대결로 가겠지만, 투표를 하더라도 원안 통과에 힘을 실어줄 위원이 과반수 이상인 것으로 파악된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위원장을 포함한 정부측 위원 6명에 재계측 위원 3명만 더해도 과반수에 근접한다”며 “대부분 위원이 무난하게 의결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고 전했다.

스튜어드십코드는 기관투자자가 돈을 댄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충직한 집사(steward)처럼 투자한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는 행동 지침이다. 기금운용위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에 관한 최고의사결정기구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원장을 맡고, 정부·재계·근로자·연구기관 등 각계를 대표하는 전문가 20명이 위원으로 참여한다.

앞서 기금운용위는 26일 서울 콘래드호텔에서 같은 안건에 대해 심의했으나 위원들간 이견만 확인하고 의결에 실패했다. 복지부가 “기업 길들이기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재계의 우려를 감안해 당초 검토했던 이사 선임·해임, 감사 추천, 정관변경 제안, 주총 소집 요구 등 강도 높은 경영참여 내용을 스튜어드십코드 도입안에 넣지 않았는데 노동계와 시민단체 추천 위원들이 이 부분에 대해 불만을 제기한 것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이 7월 26일 서울 여의도에서 열린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 회의에 참석해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당시 회의에 참석했던 한 위원은 “(노동계·시민단체 추천 위원들이) 지금의 정부 도입안은 강도가 너무 약하다며 국민연금의 경영참여를 과감하게 선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전했다.

위원장인 박능후 복지부 장관이 “오늘은 일단 도입안대로 의결하고, 경영권 참여에 대해서는 차차 논의해 나가자”며 중재에 나섰으나 강경파 위원들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회의가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기금운용위는 위원들의 후속 일정 등을 고려해 30일에 회의를 다시 열기로 했다.

◇ “독립성부터 확보” 요구 끝내 무시

노동계와 시민단체가 이번에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보이지만,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코드 안에는 결국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내용이 담길 예정이다. 정부가 재계 반발을 고려해 최초 도입안에서만 해당 내용을 제거했을 뿐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권을 흔들 수 있는 길을 차츰 열어주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6일 회의 당시 박능후 장관은 모두발언을 통해 “경영참여에 해당하는 주주활동에 대해서는 금융위원회와 논의해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법령 개정 등 제반 여건이 구비되면 경영간섭이 아닌 경영감시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겠다”고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국민연금이 기업 경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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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장관은 회의 종료 후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국민연금의 경영참여 자체는 이미 예정된 것이고, 제반 여건을 갖출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했다. 그는 재계 반발을 감안한 듯 “스튜어트십코드를 경영간섭을 위한 도구로 여겨지는 말아달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계의 불안은 여전하다. 시어머니가 많고 정치 외풍에도 쉽게 흔들리는 국민연금 거버넌스(지배구조)의 한계를 우선 해결하지 않는 한 정권 입맛에 맞게 기업을 손보는 연금사회주의 병폐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끊임없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복지부 산하 기관이다. 현재 공단을 이끌고 있는 김성주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캠프 출신이자 집권여당인 더불어민주당에 몸 담았던 정치인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장(CIO)에 선임되려면 공단 이사장의 임명 제청과 복지부 장관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기금운용위의 위원장도 CIO가 아닌 복지부 장관이다.

한 중견기업 고위 관계자는 “결국 국민연금을 비롯한 주요 기관투자자들이 정부 의도대로 기업을 조정하는 날이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국민연금 이사장과 금융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는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가 선행되지 않은 채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할 경우 독(毒)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