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부산 강서구에 있는 녹산국가산업단지. 도로변 전봇대에 붙어 있는 '공장 경매'라는 찢긴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사거리에는 '매매' '임대'라고 쓰인 현수막이 즐비했다. 2000년대 후반만 해도 녹산산단에서 흘러넘친 돈이 부산·김해 상권을 먹여 살린다는 말까지 나왔지만, 이날은 거리에 인적조차 드물었다. 공단 현장에서 만난 도금업체 J사의 박모 대표는 "주변에 공장 10곳 중 4곳은 가동을 멈췄고,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할까 봐 두려워 좀비처럼 공장 불만 켜놓은 경우도 수두룩하다"고 말했다. 현재 녹산산단의 공장 가동률은 60%대에 그친다.

도금업체 구역 옆에는 1000평이 넘는 공장 터가 텅 비어 있었다. 공장 건물을 철거한 것이다. 인근 공장 관계자는 "올 4월까지만 해도 2대(代)째 제조업을 이어온 우량 업체가 있던 자리"라며 "작년 중순 최저임금이 인상되자 매물로 나왔고 최근 공장 부지가 외국 자본에 팔렸다"고 말했다.

지난 5일 부산 강서구 녹산 국가산업단지 내 철거된 공장부지. 올 4월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2대째 이어오던 자동차 부품업체가 있었지만, 인건비 상승·경기 악화 등의 이유로 공장주가 외국계 업체에 공장을 팔고 떠났다.

한국 제조업의 뿌리 역할을 해온 17만여 중소 제조업체가 흔들리고 있다. 독일이나 일본처럼 가업 승계는 고사하고 주요 공단마다 공장 매물이 쌓이고 아예 폐업하는 사례도 급증하고 있다. 게다가 창업이 급증하는 가운데서도 제조업 창업은 올 들어 감소세로 돌아섰다. 중소 제조업을 이끌어온 60·70대 창업자들은 떠나지만 젊은 세대는 고된 제조업 창업을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공장 팔아서 자식들에게 건물주 타이틀 달아주겠다"

김포에 있는 H주물업체 김모 대표는 올 들어 최저임금이 급등하면서 회사를 접을 생각이 커졌다. 조선·자동차 등 연관 업종이 불황에 빠지면서 매출은 전성기의 3분의 1로 급감했다. 김 대표는 "올해 최저임금이 16.4% 급등하면서 외국인 근로자 15명을 포함한 인건비 부담이 월 1000만원 이상 늘어났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인근 사장들끼리 모이면 '이 사업을 언제까지 해야 하느냐' '은행에서 운영 자금을 대출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며 "예전에는 자식에게 물려주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은커녕 곧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 근로시간 단축도 납기 준수가 생명인 금형 등 중소 납품 업체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 녹산산단에서 만난 한 기업인은 "최저임금도 1만원을 넘고 50인 미만 기업도 근로시간 단축 적용을 받는 2022년이 두렵다"며 "복잡하게 규정 따져가며 가업을 승계하느니 공장 팔아서 자식에게 건물주 타이틀을 달아주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2대(代)째 부산에서 기계부품 공장을 운영하는 정모 대표는 "장남이 10년 전부터 회사에 다니며 준비하고 있지만 정부의 가업 승계 지원 제도를 이용하려면 고용 유지 등 조건이 까다로워 쉽사리 승계 결정을 못 내리고 있다"고 말했다.

◇"제조업 팔아 건물 산 사장 부러워해"… 늘어나는 제조업 폐업

제조업 기피 현상은 통계로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국세청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폐업한 제조업체(법인 기준)는 1만1936곳으로 2014년(9669곳)보다 20% 넘게 증가했다. 반면 제조업 신규 창업 수는 올 1~5월에 7620개로 작년 같은 기간(8229개)보다 7.4% 줄었다. 제조업 전체 공장 가동률은 71%로 금융 위기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고, 제조업 취업자 수도 지난 6월 12만6000명이 급감하며 3개월 연속 감소세를 나타냈다.

시화·반월 공단에서 만난 공장 매매 전문 부동산 업자인 양모씨는 "이 근방에서 우리 부동산이 파악하는 임대·매매 공장 물건이 100여 건 정도"라며 "팔겠다는 사람은 늘어나는데 구매 희망자는 거의 없어 매물이 쌓이기만 한다"고 말했다. 시화공단의 한 공장 사장은 "저녁에 중기 사장들끼리 만나면 '누구는 1년 전에 공장 판 돈으로 건물 샀다더라'는 이야기가 항상 화제"라고 말했다.

성태윤 연세대 교수(경제학)는 "창업을 통한 고용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한국 경제의 기반인 제조 중소기업을 이어갈 수 있는 환경과 여건을 정책적으로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며 "독일·일본처럼 중소 제조기업들이 수대(代)에 걸쳐서 사업과 고용을 유지할 수 있도록 기반을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